[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4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4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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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세기 봉건제도하에서의 국가 분열과 베트남 불교 

레(黎)왕조(1428~1788)에서 시행한 경제사회정책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역사에서 오랫동안 문제로 대두된 소작농과 전주와의 기본적인 충돌을 조정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하여 전국에서 소작농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막당용을 따르는 무리들이  잠시 막(莫)씨왕조(1527~1592)를 세우기도 했다. 상공업 발전을 중시한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막씨왕조에서는 나라의 어려움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찐(鄭)과 웽(阮)씨 씨족이 막씨에 대항하여 싸우는 봉건씨족들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긴 싸움으로 이어졌다.

1592년 막씨가 탕롱(昇龍)에서 축출된 이후 레씨왕조가 왕위를 다시 넘겨받았지만 찐과 웽 이 두씨족은 나라를 분열에 빠지게 하였다. 사실상 17세기 이후 지안강(爭江)을 경계선으로 하여 베트남은 2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나라가 황폐하거나 말거나 그들 두 씨족간의 분쟁은 2세기를 끌어왔는데 두 파로 나누어진 베트남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의 경제와 문화상의 실질적인 경쟁을 가져오기도 했다.

소작농의 대두와 민중의 전쟁은 레왕조 조정을 약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찐(鄭)•웽(阮)씨족이 대두되게 만들었다. 또한 그것은 유교이념에도 다방면으로 충격을 가져왔다. 왕에 대한 충성(忠誠)과 신하와 백성(臣民)의 의무와 자식의 효도 등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 정신이 사회적인 시험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념적인 혼란은 애국적인 학자들로 하여금 불교가 그들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불교의 부활은 대단한 팡파르(Fanfare)로 등단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가 우월적인 종교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대중과 관료들, 특히 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선에서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증명으로 새로운 절이 건립되었다. 레왕조의 초기(15세기)에는 6개의 절만 남았었는데 막(莫:16세기)씨왕조에는 24개의 새로운 절이 건립되었고, 새로 회복한 레왕조(17세기)에는 34개의 사찰이 복원되었다.
건축비는 민중의 모금뿐만 아니라 귀족과 왕실로부터 충당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막왕조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이 미미하지만 절과 많은 수의 남해관음(南海觀音)의 불상(佛像)이 그 당시에 민중들이 민중간에 충돌한 전쟁이 종식되기를 구세주에게 열망한 것을 나타냈음을 상기하게 한다. 이것은 베트남 역사에서 다시없었던 불교의 부활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베트남 북부의 죽림종 불교의 부활

수도의 탕롱(昇龍) 천도이후 중국계 베트남 선구자인 막씨의 축출로 여씨(레 왕조)가 재 등장하고 찐(鄭)씨가 실권을 잡았다. 그들은 여씨에 의하여 이미 수행해왔던 봉건제도를 지속하였다.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찐씨는 한편으로는 북부의 소작농의 반란을 잘 처리하여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부의 웽(阮)씨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소작인들과 대다수의 학자들이 불교로 돌아섰다. 찐씨왕조에서도 종교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보이고 절의 건설과 보수에 자금을 대었다. 1714년 찐껑왕(鄭堈王)은 1618년 찐장왕(鄭欌王)시대에 지어진 절인 푹롱사(福龍寺)를 재건하였다. 1727년에는 삼도산(三道山) 기슭에 있는 삼영(三陽)의 산정 (山亭) 마을의 선서(禪西)사를 건립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타이웽(太原)지방 포잉 깟네 마을에는 독존사(獨尊寺)를 건립하였다. 1730년 찐장(鄭杠)왕은 귄림(琼林寺)사와 숭엄사(崇嚴寺)를 복원하도록 명하였고 1736년에는 경북(經北)에 있는 보록산(寶祿山)정의 호천사 (呼天寺)와 하이영(海陽)의 찌린 푸베마을의 향해사(香海寺)를 건립하였다. 

1737년에는 경림사에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고 관료들에게 정기적으로 종교적인 행사를 집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담공선사(湛公禪師)를 중국의 정호산(頂湖山)에서 주석하고 있던 금광선사에게 파견하여 건안사(乾安寺)에 봉안할 불경을 가져 오도록 하였다.

찐(陳)왕조에 의하여 창립된 죽림선종은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살아 남았다. 레(黎)왕조 이후 이 죽림선종의 많은 선사들이 지하로 숨어들거나 멀리 산간벽지로 혹은 남부의 새로운 매립지로 은퇴하였다.
막(莫)왕조하에서 사회적으로 불교가 융성하자 진엄선사(眞嚴禪師)와 같은 죽림종의 승려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레(黎)왕조가 다시 부활하였을 때 이러한 승려들, 예컨대 원경(圓景)과 원관(圓寬)선사 같은 분이 더욱 많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죽림종이 공식적으로 되살아 난 것은 중국의 승려인 원운철철(圓雲綴綴)선사와 명행수수(明行遂遂)선사가 베트남 남부를 통하여 도착한 이후부터이다.  원운철철은 1630년 청(靑)이 명(明)을 정복한 뒤 중국을 떠나 여러 제자들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해로로 베트남에 왔는데 그 중에서 명행이 가장 명철한 승려였다. 일행은 오늘날 베트남 남부의 빈화(邊和)지방인 쩐랍(眞笠)에 상륙하였다가 얼마 후 북부베트남으로 이동하여 1633년 수도인

탕롱(昇龍)에 도착하였는데 간산사(看山寺)에서 포교하였다.
소수의 베트남인과 중국인들이 그의 강연에 참석하였다. 철철은 저명한 두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중국인 명행재수(明行在遂)와 베트남인 명량(明凉)이다. 명량의 제자는 진원(眞原)이고, 진원은 여징린각(如澄麟刻)을 제자로 삼았다. 그에 의하여 북부베트남에서 죽림선종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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