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6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6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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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베트남 불교와 유교의 융합에 대한 흐름

18세기말 베트남 사회는 다른 시대적인 투쟁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문제는 다른 어떤 시대보다 많아지고 자주 발생하였다. 왕궁 교병(驕兵: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 군기가 없는 군대)의 반란, 남부에서의 웽(阮)왕조와 북부의 찐(鄭)왕조에 반기를 든 따이성(西山), 청의 침략과 베트남의 응전과 광쭝(光忠)의 사망과 따이성(西山)의 몰락 및 웽안(阮英)에 의한 따이성의 타도 등등.

이러한 광포한 환경은 모든 유교인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임금에 대한 덕, 효, 충에 대한 자세, 평화, 지혜, 전인적인 것에 대한 것이 모두 뒤집어 졌다.

유교의 교리는 이제 구식이 되었는가? 한편으로 그 시대의 절대 다수 학자들은 다이나믹하였고, 그러한 사건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싸움에 참여하고 기꺼이 새로운 책임을 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들이 추구하고 전망하는 바와 반대였다.

학자들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을 발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유교적 방법론이 불확실해 지자 그들은 과거로 회기(回歸)하여 민중의 역사에 공존하고 있던 불교, 도교에 대하여 인식하고 이씨 왕조(李朝)와 진씨 왕조(陳朝)하에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불교 더 나아가 도교까지 존중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들은 유교 이외에 불교와 도교 이념을 같은 방법으로 여겼고 새로운 융합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 사리에 맞는 선택권을 주고, 이것은 당대의 자가당착적인 현실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사고(思考)란 “세 이념이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으며 보다 독특한 형식으로 재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개인의 경험, 성격과 지식의 정도에 따라 다른 설득력을 가지기도 했다. 전형적인 경우가 응오 터 이념(吳時)이다.

병인년(1746년) 9월 11일 하노이 근교의 탄찌현 따아 탄 오와이에서 태어난 그는 저명한 유학자인 오시시(吳時士:1726-1780) 아들이다.

30세에 과거시험을 거쳐 박사로 임명되었고 레찌우통(黎昭統)시대와 따이성(西山)왕조하에서 관료 직위에 임명되었다.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동시대에 대한 탁견을 지닌 응오터이념(吳時)은 바른 결단을 내리고 생산적인 정치를 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는 따이성(西山)을 지원하였는데 땀디입(三堞)에서의 그의 군대가 하나의 손실도 없이 무사히 철수하게 하였고, 1789년 청(淸)나라에 대항하여 싸운 전투에서는 외교적인 수단과 적절한 전술을 구사하여 승전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의 지혜로 말미암아 따이성(西山)의 광쭝(廣忠)으로부터 대단히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당대에 가치 있는 책을 저술한 희소한 작가 중 한 사람이었다. 해동지략(海東誌略:1771), 성조회감(聖朝會鑑:1783), 춘추관견(春秋管見:1786-1792), 방교호화(邦敎好話:1789-1800), 한각영화(翰閣英華: 1789-1801) 그리고 죽림종지원성(竹林宗旨原聲: 1796-1802) 등이 그의 저서들이다.

불교와 관련 있는 이 마지막 작품은 따이성(西山)이 몰락한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불교에 열성적이었던 광찬(光瓚)왕이 응오터 이념(吳時)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유교학자였던 그는 이리하여 불교에 대한 깊은 연구를 하는데 몰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그의 동료들과 함께 불교연구소를 만들고 불교 논서를 짓고 특별히 죽림종에 대하여 저술하였다.

죽림종지원성(竹林宗旨原聲)은 응오터이념(吳時)의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그의 동료들이 그가 착안한 과제에 대하여 쓴 것이다. 그것은 24개의 과목으로 분류하였고 ‘종교의 교리’로 접근하였다. 모두 24개의 종교교리는 24개의 자연의 요소와 자연의 원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판휘익(潘輝益)에 의하여 씌여지고 24성(聲)의 본문과 띠우커우(小扣) 즉 ‘작은 손가락으로 두드림’이라 부르는 결론은 해전(海田) 웽흐우담(阮有潭)이 썼다. 각 성(聲)은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도입부는 하이휀 (海玄)혹은 응오티환(吳時橫)이 쓰고 본문은 하이렁(해량)선사의 논서 혹은 응오터이념(吳時)자신이 쓴 것이며 내용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주석서는 하이아우(海歐)선사 혹은 부쩐(禹禎) 과 하이화 (海和)선사가 썼다.

죽림종지원성(竹林宗旨原聲)의 하이라이트는 응오터이념(吳時)의 염원에 따라 정신적인 유산인 불교의 다른 파를 발견한 것과 죽림종의 조직화이다.

응오터이념(吳時)가 죽림종을 선택한 이유는 이 종파가 가지고 있던 분위기가 삶과 일, 그리고 민족적 정서면에서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보다 유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죽림종의 초조인 쨘녕똥(陳仁宗)왕은 원(元)나라의 침략에 맞서 국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응오터이념(吳時) 자신도 따이성(西山)의 웽후에(阮惠)를 도와 청나라의 침략을 쳐부수었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팝로아(法螺:죽림종의 二代祖)와 현광(玄光:죽림종의 三代祖:최초의 박사시험에 장원급제)도 응오터이념(吳時)과 부쩐(禹禎)만큼이나 유명한 학자였다.

 

죽림종의 최초의 3조사(三祖師)는 작가,시인,웅변가의 재능이 있었다. 응오터이념(吳時)과 그의 동료들도 예술창작과 대화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델로서 선택한 죽림종을 응오 터이념(吳時)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잘 배합하고 그들의 사상을 보다 쉽게 발전시키기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죽림종지원성(竹林宗旨原聲)의 목적은 불교와 유교의 조화에 있었다. 작가로서의 시각은 이 두 가지 이념은 인류에게 필요하고 세월이 경과하는 과정에 서로 달라졌으나 그 근본원리가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는 한편으로는 환경에 따라 이 두 이념을 각각 적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유교는 세상사에 들어가는데 적용하고 불교는 세상사에서 나오는데 적용하여야 한다고 여겼다.

공성(空聲:교리가 없음)과 오성(悟聲:우연한 교리)에 대하여 그는 이(理)와 욕(欲)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유교의 개념이다. 불교의 명심(明心:선경지명이 있는)과 견성(見性:부처의 각성)에 대하여 그는 그것이 유교의 진심(盡心) 이나 성성(聖性)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현자(賢者)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직접적이고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선(禪)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불교인의 명상기법의 일종으로 그는 중국의 요순시대의 선위(禪位:왕권의 양위)에 비교하였다. 불교의 윤회(輪廻:輪廻轉生)에 대하여 그는 유교의 연·월·일의 순환(循環)에 비교하였다.

석가모니의 근본사상을 그는 중국의 제순(帝舜)시대의 혈통으로 믿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중국에 아직 불교가 없었다. 진인종 (陳仁宗)왕이 자진하여 불교에 귀의한 이유에 대하여도 외국의 침략의 위협에 직면한 왕의 경계의 마음에서 연유한 것임을 짐작 할 수 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유교 중심이었다.

이것은 응오터이념(吳時)의 시에서 명백하게 볼 수가 있다.

“나는 영생을 할 수도 없고 부처의 지위에 도달 할 수도 없으니,

불도(佛道)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시(詩:시경)와 서(書:서경)로 즐기리라.”

응오터이념(吳時)과 그의 동료들의 불교에 대한 미숙한 이해로 인하여 불교와 유교에 대하여 혼동하였는데 이것은 사실 잘못된 것이다.

학식있는 학자로서 그는 불교를 이해하는 지위에 있었고 당시에 베트남에서 불교에 대한 서적을 광범위하게 구할 수가 있었다. 응오터이념(吳時)은 의도적으로 행동하였는데 사회적인 격동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관점에 따르기를 원하였다.

응오터이념(吳時)과 그의 동료들은 보편적으로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 이것이 반영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신체의 존재를 인식하여 신체로부터 정신의 독립을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로 인정하였다. 그들의 생각은 생동하는 자연으로 삼교(유교, 불교, 도교)에서 찾지 아니하였다.

다시 말하면 삼교에 의하여 만들어진 설(說)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 것으로 이러한 것은 저자의 다른 작품에서 발견되고 그의 인생과 사상에 대한 변함없는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상반(相反)되게 죽림종지원성(竹林宗旨原聲)은 정확하게 불교서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죽림종의 책도 아니다. 응오터이념 스스로 생각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불려진 ‘죽림의 제4조’란 것도 그의 사상이나 행동이 삼조(三祖)와는 다른 것이었다.

응오터이념은 육근(六根:여섯가지 감각기관:눈,귀,코,혀,몸,의)과 육적 (六賊:고통과 번뇌의 근원인 여섯 가지 도적: 아름다움, 돈  ,향 ,맛 ,촉감 ,생각) 을 배척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선과 악을 한정하여 숨기지 아니하고 자타(自他)에 대하여도 제1조인 진인종(陳仁宗)이나 제2조인 법라(法螺)처럼 공(空)과 적정(寂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는 제3조인 현광(玄光)처럼 속세에서 종교의 세계로 탈피하려는 욕망도 없었다. 일부 그의 동료나 제자들 외에는 아무도 이 4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응오터이념(吳時)이 선도한 불교는 그저 하나의 우리민족사에 독특한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응오터이념(吳時)과 그의 도반들의 작품은 단지 당대를 살아가기 위한 적당한 자세와 사회의 격동기에 대한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그러나 응오터이념(吳時)은 사회가 허용하는 이론의 창조를 위한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전제(前提)가 부족하였다.

 불교, 유교, 도교는 고대의 사상이었다. 그들을 하나의 개념 속에 묶을 수는 있지만 그들의 기능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하여 불교. 유교, 도교를 새로 바꿀 수는 없었다. 응오터이념(吳時)는 이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의 작업은 사실 단지 실험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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