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7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7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6.0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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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군주제 국가의 몰락 시대의 불교

응우엔(阮氏) 왕조(1802~1945) 치하의 불교

응우엔 왕조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이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떠이선 왕조(Tay Son)에 의해 멸망당한 광남 완씨 중 응우엔 아인이 살아남아 떠이선 왕조를 타파하고 건국했다. 수도는 중부지역 후에(Hue)에 건설하였다. 따이선(西山) 왕조를 몰아내기 위해 오랫동안 방랑자의 길을 걸었고, 프랑스의 일부 지원을 받기도 하여 마침내 응우엔 아인(阮英)은 떠이선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종전의 왕조에 비하여 응우엔 왕조는 보다 대중적이고 보다 길고 넓은 영토에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남부와 북부에서 보다 많은 어려움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기도 했다. 국민의 상업 활동은 이 긴 영토에서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하였고, 열악하고 불편한 통신수단은 일부 지방과 중앙정부 간의 괴리를 가져왔으며, 많은 수의 국민이 내부적인 분파에 휘몰리고 각자의 특수한 사상과 가치관에 의하여 서로 갈라졌으며, 이 그룹은 왕조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응우엔 왕조는 나라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국민적 통합을 조화시키지 못하였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반란의 공포에 시달리고 의견을 달리하는 지방과 담판하여야 했으므로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잔혹한 정치노선을 채택하였다. 정치와 사회면에서 억압적인 일련의 법령을 공포하고 모든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그들의 손아귀에 장악하였다.

웽자롱(阮嘉龍)은 왕족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4개의 계층으로 나누어, 들에게는 정승의 지위를 주지 않았고, 제일의 박사위를 주지도 않았으며, 왕후간택도 허용되지 않았고, 지주(地主)로서의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명명왕(明命王)은 지방 행정기구를 폐쇄하고 전국을 29개 지방으로 나누어 중앙정부에서 직접 통치하였다. 왕은 모든 반대세력과 약간의 혐의가 있거나, 심지어는 왕조의 창업에 공헌하였다고 여겨지는 검소한 고관들마저도 대량학살 하였다.

문화, 사상, 종교 분야에 있어서도 응우엔 왕조는 중앙집권과 그들의 통치에 이익이 되는 신앙과 가르침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유교로 선회하여 유교사상을 숭상하였으며 불교, 도교, 그리스도교 등을 비판하고 억압하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하여는 응우엔 왕조는 일정기간 이 종교를 믿는 것을 금지하였고 교회를 허물고 신도들을 감옥에 보냈다.

불교의 발전을 통제하기 위하여 승려를 제한하려고 애쓰고, 그들에게 사회활동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였으며, 민중에 대한 사찰의 영향력을 제한하였다. 불교 신자 수를 줄이고 불상과 종의 주조와 사찰의 건축을 제한할 목적으로 가혹한 법조항을 제정하였다.

대남식력정변에 따르면 가룡(嘉龍)왕은 승려등록을 실시하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발표하였다. "승려가 50세가 넘으면 부역을 면제받지만 50세 이하는 부역을 해야 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처벌한다.” 같은 책에서 가룡왕의 다음과 같은 결정이 기록되어 있다.

"근자에 불교신자들이 절을 건축하는데 너무 높고 장엄하게 하며, 불상과 종의 제작에 너무 돈을 많이 들이고, 종교적인 행사와 축제에 너무 많은 비용을 쓰며, 승려를 공양하는데도 돈을 많이 쓰니 이러한 것들은 돈과 자원의 낭비를 초래한다. 오늘 이후부터 나는 낡은 절의 수리만 허용하고 모든 신축 절의 건축을 금지하며 모든 불상과 종의 제작과 불교신자들의 행사와 축제를 금한다. 각 고을의 수령은 관내에 있는 절의 명세를 지방관에게 보고하라"

왕조에서 불교의 정신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불교의 전승자로서 부처가 된 목련도 그의 어머니를 구할 수가 없었다. 불교를 믿는 소연(逍演)도 그의 목숨을 지키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현세불(現世佛)인 임금에 충성하고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공경하고 누구든지 임금과 부모에게 태만하게하면서 멀리 보이지 않는 부처로부터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택한다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응우엔 왕조는 불교가 나쁜 종교이며 불교도들은 유교이념을 받아들이는 것과 봉건제도의 교육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여겼다.

응우엔 왕조의 관점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고 면밀한 분석이나 어떤 자세한 내용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불교의 근간을 강하게 파괴하고 지배 집단을 형성하였다. 가혹한 법률의 비호 하에 승려의 지위를 조이고 종교의 위축을 가져왔다. 이러한 토대위에 베트남 불교는 응우엔 왕조시대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석밀세(釋密體) 선사에 따르면 나라의 왕조가 바뀌는 순간(嘉龍-)부터 불교는 견제되고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복전선사(福田禪師)이 시대로부터 베트남 불교의 모든 면에서 장엄하다고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에도 베트남에서 불교는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등록과 왕실에 의한 비판은 어느 정도 그 위상을 위축되게 하였지만 지속적인 발전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불교 집단은 왕실에 그들의 법령과 포고령을 재고해 달라고 요구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평에 대하여 답하지도 아니하였다.

그들은 왜 지나치게 독단적이거나 과도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하였는가?

불교가 아직도 모든 사회 계급에 조용하게 침투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생활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기에 굳이 나서서 맞설 필요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유교가 사회적인 유대관계와 관리들의 생활 기본이념으로 생각되었지만 불교에 견주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황태후, 황후, 공주, 후궁, 배우들조차 열렬한 불교신자임이 증명되었다. 부처를 공경함으로써 그들은 현세에 복을 받고 내세에 열반에 들기를 희망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남편들에게 집 안에 탑을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복전선사에 따르면 군주들은 부처를 가까이 하고 매일같이 기도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탑을 세웠다.고 하였다.

응우엔 왕조의 모든 왕들이 불교를 비난한 것은 아니다. 가룡(嘉龍)이나 투덕(守德)왕과 같이 몇 몇 왕은 불교에 대하여 회의적이었지만, 다른 왕들은 신심(信心)을 보였다. 사실상 가룡은 새 왕조를 건립한 왕으로써 반대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방안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왕에 대한 존경을 역설하여야 하였다.

이후에 응우엔 왕조가 몰락하는 시기인 투턱(守德)왕의 치세에도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역시 공자의 가르침에 의지하였다. 민망왕(明命王)과 티우찌(紹治)왕은 백성들의 정신적인 생활을 고려하였고,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려고 불교에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 관용적인 정책을 채택한 이 두 왕은 왕족과 고관 귀족들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고관 귀족들은 불교가 일종의 미신이라고 치부(置簿)하고 종교의례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절의 건설은 백성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불교의 가르침은 국왕에 대한 존경과 국왕에 대한 의무와 부모에 대한 공경을 앙양(昻揚)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가끔 민망(明命)왕은 자신의 불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기 위한 제스처로 불적사(佛積寺)의 액막이 축제행사를 결정한 것은 부처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는가 하면 나는 불교에 대하여 승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말은 성연사(聖緣寺)에 방문하였을 때 쓴 시()에 나타나 있다.

티우찌(紹治)왕은 진심으로 절의 건축과 불상과 종을 주조하고 불사를 하는 것 등을 허용하는 행동을 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절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역사적인 사료에 따르면 그의 치세 3년 되던 해에 이런 종류의 시 20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념비 하나를 세우고 석주에 조각할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민망왕(明命王)과 티우찌(紹治)왕의 치세에는 많은 승려들이 그들의 전문분야에 따라 증명서가 수여되고 여러 날 동안 많은 액막이 행사를 거행할 수 있었다. 많은 학자들과 관료들 또한 비록 다른 정도 이긴 하지만 불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고위의 왕궁 귀족들은 자신이 보리살타라는 생각을 가지고 집에서 불교예법으로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결국 응우엔 왕조의 사찰 건축과 불상의 주조와 승려들의 신분증에 대한 가혹한 조치에도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영향 밖에 주지 못하였다. 응우엔 왕조 치하에서 절은 대소(大小), 신구(新舊), 가족단위, 촌락, 국민 등의 조직 단위로 발전하였다. 왕도인 후에를 특별하고 호화롭고 장엄하게 하였다.

나라의 최남단인 남부(南部:코친차이나)에서도 사찰이 우후죽순처럼 지어졌다. 백성들은 항상 부처의 가호를 빌기 위하여 어디든지 새로운 땅에 절을 지었다. 응우엔 왕조 하에서 승려들은 주요한 세력을 이루었다. 큰 사찰에는 30명이상의 승려가 작은 사찰에는 5-7명의 승려가 거하였다. 승려들은 하루에 3-4차례 아침, 점심, 오후, 저녁으로 불경을 음송(吟誦)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응우엔 왕조하의 불교가 불교와 왕실의 상호작용을 통한 왕실과 절의 관계에 의한 종교적인 심리구조, 절의 조직망, 승려의 조직, 의례 등에서 이전의 다른 왕조와 유별나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은 자신의 관점을 공유하려고 애썼다. 동시에 세상에 대한 개념과 전통적인 신앙으로 불교는 왕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썼고 독립적인 발전의 길을 모색하고 그들 자신의 방향에 따라 왕실을 대하고 왕실의 품행에 영향을 꾀하였다.

절은 언제나 대중의 축제의 중심지가 되고 그들은 농촌의 축제, 관습 그리고 풍습과 경쟁하는 것을 보여주고 이를 계승하였다. 일반 대중사이에 부도덕한 전통이나 관습에 대하여 절은 인재와 도덕을 함양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장소로 인식되었다.

부처에 의하여 포고된 오금(살인, 도적질, 속이고 거짓으로 하는 邪淫, 음주)’은 주요한 도덕적인 가르침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수행은 도덕적 성격을 아름답게 하고 인간관계를 지도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그들의 믿음을 쏟아 부음으로써 과거 전통을 정제하고 보전하는 것을 통하여 자연적인 재해와 가혹한 정부의 규제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였다.

중부 베트남에서는 특별히 수도 후에(Hue)에는 고대 베트남과 참파문화의 양태를 간직한 새로운 건축양식의 절이 지어졌다. 남부의 경우에는 이와 다른 서남아시아 건축양식을 채택한 새로운 다수의 절과 탑이 건축되었다. 응우엔 왕조 하의 절과 탑의 서로 다른 양식의 건축을 통하여 우리는 지난 세대의 심리와 도덕과 기술 및 재능을 식별 할 수 있다.

다량의 불교 경전이 출판 되었다. 북부의 보타사(菩陀寺), 자광사(慈光寺), 연통사(蓮宗寺)등의 일부와 후에(Hue)에 있는 많은 절에서는 이 경전을 나무에 새기거나 목판에 새겨서 보관하였다. 불경, (), 법규, 계보(系譜)등도 출판되었다. 불경은 그 수량에서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많이 출판되었다. 그 중에서도 화엄, 법화, 약사, 지장, 삼천불명, 대유타(大維陀), 선원집영어록(禪苑集英語錄), 계등록(繼登錄), 삼조식록(三祖識錄)이 있다. 이러한 불경으로 제자들은 그들의 지위에서 불교의 뿌리와 근본적인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였고 진리의 길로 들어서고 악의 근원을 뿌리 뽑았다.

승려의 경쟁시험을 통해 정규조직을 하고, 종파적인 이념조정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면학(勉學)과 도덕성을 검증하였다. 절은 보다 조직화 되었고 승려들은 이론적으로 잘 교육되었고, 종교적인 행사가 매우 질서정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씨 왕조, 북부의 鄭氏王朝와 남부의 阮氏王朝 뿐만 아니라 서산(西山)왕조 하에서도 보여주지 못한 모습이었다.

응우엔 왕조 하에서 불교는 또한 문학 특히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시인과 작가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국민의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은 나중에 베트남의 문학에 새로운 기여를 하였다. 그들의 창작에 불교를 기초사상으로 채택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에 대한 사고(思考)와 현세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베트남의 불교역사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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