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8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8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6.1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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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군주제 국가 몰락의 시대 베트남 불교
응우엔 왕조의 대표적인 승려들

응우엔 왕조하에서는 사회적인 위신과 그들의 종파를 헌양하는 불교이론에 대한 유명한 승려가 없었다.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러한 사람들의 출현을 조장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미래의 종교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들의 조직을 강화하는데 진력하며 그들의 믿음을 전파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불교의 대변자였다.

이들 대변자들 중에 왕실로부터 종교에 관한 증명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지식과 믿음, 그리고 도덕성으로 그들 전임자들과 같이 많은 추종자들로부터 그들의 지도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분야는 당대의 불교의 자랑스러운 자료이다.

응우엔 왕조하에서 저명한 승려들은 전국에 흩어져 살았다. 북부에는 하노이의 린똥사(蓮宗寺)와 틴광사(禪光寺)에서 주석한 북딘(福田)선사, 하노이 운재사(斋寺)의 띳쭈엥(寂傳) 일명 금연(金蓮), 틴광사(禪光寺)와 운재사(斋寺)의 보적(普寂), 하노이 함룡사(含龍寺)의 탄영(呑詠), 닌빈(寧平) 벽동사(碧洞寺)의 청담(靑潭) 일명 명진(明眞), 하북(河北) 대각사(大覺寺)의 안선(安禪), 영평사(寧平寺)의 청원(靑原) 일명 명남(明南).

중부베트남의 후에에 있던 영휴사(靈休寺)와 천토사(天土寺: 일명 報國寺)에서 주석했던 일정선사(一定禪師: 일명 성천선사(聖天), 후에의 묘제사(妙帝寺)의 묘각(妙覺)혹은 해순(海順)선사(선사는 후에의 금선(金仙), 보국(報國), 혜림사(慧林寺)의 재건에 중대한 공헌 함), 후에의 묘제사와 푸엔(富安)의 팔아사(八雅寺)의 각오(覺悟), 후에의 각황(覺凰), 영광(靈光), 국안(國安)사의 요철(了徹) 일명 자명(慈明), 천토사(혹은 보국)의 보정(普靜)일명 도녕(道寧), 푸엔의 자광(慈光)사의 묘엄(妙嚴), 평정(平定)의 탑탑이다(十塔彌陀)사와 후에의 국안(國安)사와 가정(嘉定)사의 밀홍(密弘)이 있다.

 

남부지방에서 유명한 승려로는 가정(嘉定) 흥룡사(興龍寺)의 복안(福安), 가정의 난아(蘭雅)사의 원오(圓悟), 가정의 집복(集福)사의 원광(圓光), 가정 방산(方山)사의 요통(了通) 일명 진각(眞覺)선사가 있었다.

당대에 나라안의 다른 지방으로 여행하는 것이 옛날보다 자유로워졌으므로 문화와 신앙이 세 지역에 고루 발달하였다.

사회가 보다 혼란하게 될수록 불교도들은 정신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였다. 이것은 지식과 칭송을 함께 받는 각 지방의 대표적인 스님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 많은 대표적인 승려들은 매우 광범위 한 활동영역을 가졌다.

그들은 자연의 지역적이고 종파적인 한계를 두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왕가의 부름이나 민중들의 부름에 응하여 여행하였고 때로는 산간벽지라도 그들의 신앙을 파종하기에 적지(適地)를 발견하면 갔다.

이들 선사중에서 요통(了通)선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탄화에서 멀리 떨어진 까이마이(梅木)에서 선교하였고, 밀홍(密弘)선사는 평정을 떠나 후에 갔다 다시 돌아옴으로서 종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전국을 돌았으며, 복전(福田)선사는 불교중심지인 하노이를 출발하여 북녕(北寧), 산서(山西), 남정(南定)로부터 후에를 지나 하노이로 돌아갔다.

이같이 모든 승려들은 나라의 방방곡곡 불교신자들을 결집시키는데 공헌하였고 오늘날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통일된 불교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이들 승려들은 서로 다른 종파에 소속되었다. 보정(普靜) 일명 광남(廣南)은 요관종(了觀宗), 밀홍(密弘)과 원광(圓光)은 원소종(元少宗), 청담(靑潭)은 진원종(眞元宗)소속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밀홍은 3대의 제자를 가르쳐 첫번째는 일정(一定), 둘째는 묘각(妙覺)과 강기(剛己), 그리고 셋째는 원각(圓覺)과 혜법(慧法)이 있다. 적전(積傳)1대의 제자를 길렀는데 그들 중에 소관(昭寬)과 그 다음 세대인 하노이의 보정(普靜)을 꼽을 수 있다.

복전선사(福田禪師)는 통영(通永)과 안선(安禪) 같이 빼어난 제자를 길렀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독특한 교리나 의식 혹은 도덕을 개발하지는 못하였다. 이 종파에 등록된 세대의 승려 이외에는 우리에게 그들과 다른 특별하게 따로 언급할 승려가 없다.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당대에 불교의 독자적인 발전을 왕실에서 방해하고 각별하게 지속적으로 어느 일정기간동안 종파의 미래에 대하여 조종하였다는 것이다.

절에서 행하는 의식을 통하여 승려들은 불교의 이념적인 문제를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그들의 사상은 나중에 그들의 종교생활을 집약하여 게()로 남기거나 불경으로 남겼다.

그들은 정신과 육체에 대한 관계, 영혼과 자연, 존재와 공(), 근원적인 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들 승려들은 만물의 근원이 정신이라고 생각하고 텅빔(虛空)이 만물과 세상의 정수(精髓)라고 여겼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지식은 그들의 선지식(善知識)에 대하여 아무것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들 승려들은 자신들이 종교의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련의 성취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불경과 규칙에 대한 주석서와 사본뿐만 아니라 다수의 논서를 보관하는 불교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이러한 문서들을 보관하고 산포(散布)하고 인쇄하고, 목각에 새기고, 강해하고, 주석하고, 교정하고, 분류하고, 수집하는데 공헌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 승려들 중에 복전(福田), 안선(安禪)과 묘엄(妙嚴)은 축적된 자료를 기반으로 고불경의 용이한 해설서와 귀중한 불교역사서를 집필하였다.

예를 들면 복전은 선원전등약력(禪苑傳燈略歷)을 안선은 도교원류(道敎源流), 청담은 법화강요(法華綱要)와 삼경직해(三經直解), 묘엄은 사의율요략(事儀律要略)과 사이규연(事儀規捐)을 저술하였다.

안선의 도교원류부터 우리는 수많은 불경과 논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보적경(寶寂經120), 화엄범갑(華嚴梵甲82), 화엄방책(華嚴方冊 81), 불본행(佛本行60)을 비롯하여 84권의 불경이 있다. 대율장(大律藏40)을 비롯한 26종파의 불교규정이 있다. 4개의 주석서와 61개의 사본외에 불조총기 (佛祖總記 55)이 있다.

이러한 문서들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승려들이 종이와 목판을 사고 나무에 조각을 하고 인쇄하고 조각한 목판을 보관할 수 있는 방을 제공한 사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사(佛事)에 대한 비용은 신자들의 기부로 충당하였다. 이들 사찰은 하노이의 연종사(蓮宗寺혹은 蓮派寺), 박닌(北寧)의 천복사(天福寺), 보산사(菩山寺), 대각사(大覺寺)와 후에에 다수가 있었다.

응우엔() 왕조하에 승려들의 보다 중요한 활동의 하나가 베트남 역사와 세계 역사의 조직적인 표현이었다. 당대에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소수의 불경이 들어왔고 그 내용은 베트남 불교도들에게는 이질적이고 어려운 것이었다. 베트남에서 불경은 진왕조 때에 씌어진 선원집영(禪苑集英), 전등록(傳燈錄), 제조록(諸祖錄) 등이었다.

응우엔 () 왕조하에 승려들은 베트남 불교역사를 쓰기 위하여 필요한 고대의 서적을 베트남 혹은 다른 곳에서 구하여야 하였다. 복전(福田)선사와 그의 제자 안천(安天)은 이일에 의욕적으로 참여하였다.

응우엔 왕조하의 승려들의 작업은 당대의 불교의 개척에 대한 영향을 받아서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승려들의 역량이나 일반대중 불교신자들의 요구에 따라서 역사의 중요한 국면에 대한 해석과 문서의 수집으로 대체적인 방향이 정해졌다. 이일은 자연적으로 그들 성공한 사람들에 의하여 불교는 보다 앞선 길을 열고 사람들에게 회고(懷古)적 기대를 가져오거나 주는 방향을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참고가 되었다.

청담선사(靑潭禪師)는 불교에 대한 많은 고전적인 경전을 해설한 것으로 여겨지고 불교교리에 대한 다수의 논문을 썼는데 이 작업은 열렬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법명을 명진(明眞)으로 하여 닌번(寧平)의 벽동사(碧洞寺)에서 주석하였던 청담(靑潭)은 진원종(眞元宗)의 도원선사(道元禪師)의 제자였다. 1807년에 출가하여 1819년에 법화강요(法華綱要)를 저술하였고 1843년에는 삼경발아바라밀다직해(三經發芽婆羅密多直解)를 썼는데 둘 다 모두 불교사상을 다룬 것이다. 영지(靈知:gnosis)와 본체론(本體論:ontology)을 기초로 한 불교의 중심사상인 정신(精神)에 대하여 크게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응우엔왕조의 불교경전에 대한 창작에 있어 최고의 공적은 복전선사에 돌려야 한다. 속명(俗名)이 무()로 하노이의 산명(山明)출신으로 나이 12살에 출가하여 하노이에 있는 청열사(靑烈寺)에서 공부하였다. 나이 20살 때 박닌(北寧)의 법운사(法雲寺)에 들어갔다. 명망(明茫)치세 24년에는 박닌(北寧)에 보산사(菩山寺)를 설립하였다.

소치(紹治)삼년 산서(山西)에 있는 부니사(富尼寺), 소치 6년에 하노이의 연지사(蓮智寺), 소치 7년에는 하노이의 보천사(普天寺)를 설립하였다. 자덕(自德)5년 하노이의 연종사(蓮宗寺)를 재건하기 위하여 돌아왔다.

명망(明茫)치세 동안 복전(福田)은 수도인 후에(Hue)로 특별시험에 불려갔다. 마침내 교리에 관한 자격을 부여 받았다. 그는 몇 달 동안 왕도에서 머물면서 불교에 관한 왕의 포고와 법령을 연구하고 남부지방의 불교를 공부하기 위하여 지역 내의 사찰을 방문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나중에 그의 저작에 반영되었다. 그는 80세로 입적하였는데 북부지방의 많은 절 하노이의 연종사, 선광사, 함룡사 산서의 부니사, 북녕의 보선사, 남정지역 많은 절에서 존숭(尊崇)되었다. 그는 통영(通永)선사, 안선(安禪)선사, 보정((普靜)선사 등의 유명한 제자를 두었다.

복전이 70년의 불문에서 생활하는 동안 통킹델타(北部)의 거의 모든 절을 방문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불상과 절을 보수하고 승려를 교육하고 훈련시켰다. 그는 자발적으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읽고 쓰고 책을 편찬하고 이 언어로 상담하였다. 그는 더불어 불교와 유교와 도교를 가르쳤다. 이 세 가지 종교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만들었고 불교에 대하여 보다 높은 존경심을 부여하였다.

복전은 다방면의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썼는데 방생계살문(放生戒殺文), 삼교관규(三敎管窺),선원계등약록(禪苑繼登略錄),삼보홍통(三寶弘通),제경일송도(諸經日誦圖),선가경주각권(禪家經註各券),소유야(小遊耶),재가수지(在家修智),오계(五戒), 십계첩(十戒牒),기안찬정첩(記安撰精牒),음혼첩(陰魂牒),교정불조통기(校訂佛祖統紀),사위방책(四圍方策),각제사적(各諸事迹)등이 있다.

그는 많은 불경의 편찬과 조각을 감독하고 하노이의 연종사와 하북(河北:북녕:北寧)보산사(菩山寺)에 그 사본을 보관하였다. 그의 견해는 유교와 충돌하지 않고 하늘의 가르침 혹은 인간 양심에 따라 삶을 존중하는 것, 이를 만약 정치에 적용한다면 나라의 평안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 복전은 불경을 인용하고 또한 공자가어(孔子家語), 맹자(孟子), 예경(禮經)을 인용하였다. 작품은 이해하기 쉽게 간단하게 씌어졌다.

또 다른 중요한 작업은 중국의 운세사(雲世寺)의 주홍(周弘)선사에 의하여 씌어진 사미율의해의(沙彌律疑解義)의 번역이었는데 이것은 복전에 의하여 베트남 불교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되었다. 승려를 가르치는 일과 불교에 통달하는 것은 공부하는 방법이며, 사는 법이며,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법이었다. 다시 말하면 불교 활동을 생활방식으로 채택하는 것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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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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