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지압장군, 103번째 생일 맞아
살아있는 전설 지압장군, 103번째 생일 맞아
  • 베한타임즈
  • 승인 2013.08.3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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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국민 영웅 버응웬지압(Vo Nguyen Giap) 대장은 올해로 103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지압장군은 1911년 8월 25일 출생했으니 지난 25일이 만 102세가 되는 날이다. 지압 장군의 103번째 생일을 맞아 응웬신훙(Nguyen Sinh Hung) 국회의장이 직접 지압장군을 방문하여 장수를 기원하며 생일선물을 드렸다.

지압 장군의 인생은 가장 혹독하고 치열한 시기를 살았지만 20세기 베트남 역사를 이끌어 온 산 증인이다. 그는 시대의 천재적인 전쟁 지략가일 뿐만 아니라 재덕 있고 문무겸비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의 재능과 넓고 관대한 마음씨는 전 국민의 흠모를 받아 왔고, 국제적인 명성은 한때 그의 적수였던 이들도 감탄하게 만들었다.

 

 

군사교육 안 받고도 혁혁한 전과

지압 장군은 1911년 베트남 중부 꽝빙성에서 가난한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인 1925년부터 혁명 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1929년 신월혁명당(Tan Viet cach mang dang)과 동양공산연단(Dong Duong cong san lien doan)의 개조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정치활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도 프랑스 식민정부에 희생양이 된다.

1939년 9월 말 프랑스 식민 정부는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했다. 지압은 중국으로 도피하고 그곳에서 호찌민 주석을 만나서 동양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함께 공산당 활동을 한다. 1941년에 지압 장군은 베트남으로 돌아와 혁명조직을 구성하며 월명전선(Mat tran Viet Minh)을 창설하여 월명군의 전사훈련을 당담한다. 1944년 12월 22일에 호찌민 주석의 위임을 받고 베트남 선전해방군(베트남 인민군대의 전신)을 창립하고 주휘한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이 항복하자 이번에는 옛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베트남으로 진주했고, 지압 장군은 최고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지압 장군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된다. 1954년 5월 7일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푸에서 게릴라부대나 다름없는 북베트남군을 이끌고 프랑스군 5000명을 사살하고 1만1000명의 포로를 사로잡으며 8년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지었다. 호찌민 주석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 사망했지만 당시 월맹은 지압 장군이 버티고 있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승리를 쟁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압 장군의 전쟁 경력을 보면 마치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군인 출신 같지만 그는 정식 군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이다. 단지, 중국에서 독학으로 군사 훈련을 터득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한번은 수류탄이 손에 들어왔는데, 그걸 어떻게 터뜨리는지 알 수가 없었어. 제식훈련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지. 우리는 프랑스 군대를 흉내 내면서 배웠어."



'코끼리와 메뚜기의 싸움'… 90년간 프랑스 식민지배 종식시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지만 프랑스군은 1945년 10월 6일 기갑사단을 이끌고 와 남베트남을 장악한다. 베트남 내의 공산당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은 프랑스군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한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군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지압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다. 호찌민 주석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코끼리와 메뚜기의 힘 겨루기' 라고 표현했을 만큼 이 전쟁은 베트남에 불리한 전쟁이었다. 프랑스군은 공산화된 중국으로부터 지원받던 베트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라오스를 통과해 프랑스군의 배후를 치려던 베트남군의 작전을 사전 봉쇄하기 위해 중국과 라오스의 국경과 인접한 디엔비엔푸에 전진기지를 건설한다. 분지 지형인 디엔비엔푸에서 보급로를 차단해 베트남군을 유인, 섬멸한다는 것이 당시 베트남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 앙리 나바르의 계획이었다. 그는 강력한 공군력과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화력을 믿고 승리를 장담했다.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프랑스군은 항공기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는다. 하지만 앙리 나바르 총사령관의 계획은 빗나간다.

진지를 완전하게 구축하기 전에 프랑스군을 치자던 지휘관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지압 장군은 "우리는 이기러 왔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라며 적당한 시기를 기다린다. "빠른 타격, 빠른 승리" 라는 전투 방식에서 "확실한 타격, 확실한 전진" 이라는 전략으로 변화를 갖도록 결단한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군이 진지를 구축한 지 5개월이 지난 3월 하순에 베트남군은 공격을 감행한다.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남동풍을 이용한 화공으로 조조군을 섬멸했듯 지압 장군은 남서풍을 이용한 수공으로 프랑스군을 섬멸한다. 베트남은 4월이 되면 인도양과 벵골만에서 불어오는 습도 높은 남서풍으로 인해 엄청난 비구름이 형성된다. 프랑스군은 건기(乾期)인 3월까지 임무를 완수하고 철수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계획과는 달리 베트남군의 공격은 잠잠했고 3월 하순부터는 우기가 시작됐다.

엄청난 폭우로 인해 항공기로 인한 보급이 차질을 빚게 된다. 지압 장군은 차단된 보급로 대신 자전거를 이용해 산악과 정글길을 이용해 베트남군의 전쟁 물자를 나른다. 베트남군은 중국과 소련에서 지원받은 200문의 화포를 분해해 등에 지고 산악의 정글을 헤쳐 언덕 위로 옮긴다. 비를 뚫고 저고도로 보급품을 공수하려던 프랑스 항공기들은 베트남의 대공포에 속절없이 추락하고 만다. 굶주림과 말라리아, 임질,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은 프랑스군을 하나둘 죽음으로 몰아간다. 마침내 베트남군의 공격이 절정에 다다른 5월 7일, 지압 장군은 쇠약해진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으며 90여년에 걸친 프랑스 식민지배의 사슬을 끊는다.



퇴임 후 청빈한 삶으로 더 존경받아

지압 장군은 퇴임 후 더 빛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청빈한 삶을 살면서 귀감이 되고 있어 베트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는 베트남이 통일된 후에도 국방부 장관, 정부 부총리 등의 여러 중책을 맡아 해냈다. 1991년 은퇴했지만 베트남 내 그의 영향력과 국민의 사랑은 여전하다. 은퇴 후 사이공 해방 기념일, 호찌민 주석 생일 등 주요한 공식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영국 엑세터대학 사학과 교수 제러미 블랙은 2008년 저서 '역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들' 에서 지압 장군을 격찬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시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군사 지휘관으로 소개된다. 책에 소개된 인물들은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역사를 바꾼 영웅들이다.


[글-그림: 베트남픽토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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