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위한 글쓰기 4] 백지와 연필
[입시를 위한 글쓰기 4] 백지와 연필
  • 베한타임즈
  • 승인 2019.09.1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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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6개월 아기도 연필을 잡을 수 있다. 연필을 쥔 아기에게 백지를 주면 어떻게 할까. 백지에 연필로 그리기 시작한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표현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기록인지 낙서인지는 사고의 과정을 거쳤는가의 여부에 달려있을 뿐이다. 아기가 낙서를 했다고 엄마가 반응을 하더라도 어쩌면 기록일 수 있다.

백지와 연필은 생각을 이끌어낸다. 생각의 주머니(뇌)에서 밖으로 사고를 이끌어내기도, 생각주머니에서 넘쳐흐르는 다양한 생각들을 단순하게 정리해 주기도 한다. 백지와 연필만 있으면 사실 글은 시작된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 인 것이다. 떠오르는 모든 것을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토해내는 연습을 자주 많이 할수록 좋다. 글쓰기는 뇌의 인출 과정이다. 밖으로 꺼내려할 때 절차가 복잡할 필요는 없다 백지에 연필로 쏟아내듯 적어 내려가다가 적은 것들 사이의 의미나 관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정교화 하다보면 생각을 갈무리하기 쉬워진다. 생각의 흐름이 물 흐르듯 하면 글이 쉬워지고 읽기도 쉬워진다.

누구나 읽기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 했다. 쓰기도 읽기도 쉬워야 편안하다. 어려우면 불편해지고 불편하면 생각이 막힌다. 술술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글이 논술이다. 술술 생각을 풀어내면 쉽다. 시험을 위한 논술이라고 어려울 것은 없다. 자주 안 해본 작업에 대해 낯설다는 정서를 느끼면 뇌는 어렵다고 인지할 뿐이다. 자주 연습한 것을 정서는 편안하게 느끼고 뇌는 그 작업을 처리하기 쉬운 일로 인지한다. 백지와 연필만 있으면 쉽게 글을 시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입시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두려움이다. 생각이 풀리지 않고 마음이 복잡할 때, 뇌는 아무 것도 결정할 수 없다. 뇌가 편안함을 느끼고 있을 때 제대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5개의 선지에서 4개의 오답을 가려내고 단 한 개의 정답을 판단하는 결정력은 결국 뇌의 평정심에 달려있다. 긴장감(stress)이 너무 낮거나 높으면 뇌의 작용은 제대로 이루지기 힘들다. 가령, 수험생은 문제지를 받으면 즉시 읽고 풀어 내려간다. 자동 반사적이다. 문제가 빼곡히 적힌 문제지를 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달려든다. 뇌가 즉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백지를 만나면 어떨까. 텅 빈 종이 한 장을 받은 수험생은 얼음이 되고 만다. 동공 지진과 함께 갈 곳 잃은 손은 이것저것 뒤적거리다 원고지를 발견하고 일단 칸을 채우기 시작한다. 너무 높은 긴장감으로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표현처럼 뇌가 그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학부모들은 놀랄 지도 모르겠다. 설마 그 중요한 순간에 내 아이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사실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사례를 보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백지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 빈 땅에 집을 짓는 것이 너무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도대체 뇌의 백지상태에 강해지려면 무엇을 하면 될까. 우선 뇌 속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면 된다. 말로 해도 좋고 글로 해도 좋다. 성향에 따라 말이 편할 수도 글이 편할 수도 있다. 텅 비어 있는 창고에서는 꺼낼 것이 없지만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뇌는 없다. 각자의 삶을 살아온 발자취가 차곡차곡 뇌 안에 쌓여 현재까지 나의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이다. 꺼내 본 적도 없고 꺼낼 필요와 기회의 부재로 인해 낯설게 느낄 뿐이다. 백지보다는 내용이 채워진 문서에 익숙하게 살아 왔기 때문이다.

백지를 채우기가 여전히 어렵다 느낀다면 단어나 그림으로 표현해도 좋다. 글의 재료는 무한하고 표현의 방식은 자유다. 주제에 대해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를 폭풍이 몰아치는 기분으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쏟아내듯이 적다 보면 나의 직·간접적인 경험과 융합한 또 다른 단어들이 재탄생한다. 꼬리를 물고 자유롭게 연상되며 파생해가는 재미있는 사고의 확장과정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시작할 때, 보통 두 가지 상황을 만난다. 주제에 대한 생각이 넘쳐서 정리가 힘든 경우와 생각이 텅 비어 떠오르지 않아서 적을 내용이 없는 경우다. 튼튼한 줄기와 뿌리를 중심으로 무수한 가지를 뻗고 무성한 이파리를 펼쳐나가면 훌륭한 나무를 그릴 수 있다. 개요를 짜는 일은 가지와 이파리를 몇 개로 할지, 어떻게 구성하고 디자인할지 궁리하는 과정이다.

본 글을 쓰기 전에 일종의 예고편을 짜는 것, 시뮬레이션 시스템을 세우는 작업이다. 즉,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이는 것에 대한 목차 구성이다. 뼈대는 크게 잡되, 살은 세심하고 치밀하게 붙여나가야 한다. 얼마만큼의 양을 어떤 강도로 붙여 나갈 지 결정하는 작업이다. 개요단계에서 그런 일련의 작업을 하지 않고 그냥 줄을 채워나가듯이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뼈대가 몇 개이고 살을 어디쯤에 얼마만큼 붙여야 할 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나의 사고의 흐름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된다. 치명적 오류가 발생해도 고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즉흥적으로 적어 내려간 것은 글이라고 볼 수 없다. 메모 수준의 생각 나열일 뿐이다.

서론, 본론, 결론에서 밝혀야 하는 내용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문장마다 단락 속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해야 글 전체의 주제가 합리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주제를 흔들리게 하는 문장이나 표현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예고편을 개요에서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략적인 개요는 문장 맥락을 다듬고 오류를 재정비할 수 있기에 균형 잡힌 글을 완성하도록 돕는다. 합격이라는 명료한 목표를 가진 글을 쓰는 상황에서 메모를 길게 늘어놓고 합격을 기대하는 우스운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불합격하고도 분명한 원인을 찾기보다는 자의적으로 합리화하는 수험생들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패인을 모르는 장수는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자소서든 논술(구술)이든 맥락은 하나다. 정곡을 찌르면 승리한다. 전략적 개요를 세우고 균형 잡힌 글을 쓸 수 있다면 충분하다. 최근 논술평가는 축소되는 추세가 아닌지 질문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논술을 소홀히 할 분명한 이유는 없다. 문자로 주장하면 논술이요 말로 주장하면 구술일 뿐, 대학입학의 관문에서 수험생에게 요구되는 학생의 역량을 평가하는 수단은 한결같다. 본질을 모르거나 흐리는 입시정보의 흑백을 현명하게 재해석하고 선별하는 수험생이 되기를 바란다.

국어융합교육콘텐츠연구소 한결可치 대표 김한결 cozy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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