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위한 글쓰기 7] 왕관의 무게
[입시를 위한 글쓰기 7] 왕관의 무게
  • 베한타임즈
  • 승인 2019.10.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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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아버지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녀들은 아버지가 퇴근한 그 저녁에 학원에 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자 아버지들은 저녁을 되찾았는데, 자녀들은 지식을 쌓고 훈련을 반복하기 위해 학창시절 12년을 학원에서 저녁을 보내야 하다니... ‘웃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한국의 미래인재들은 지금 학원에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지식의 양을 채워 넣기 보다는 그 지식을 어느 곳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면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가에 대한 물음에 능수능란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현재 한국의 교육과 입시 현실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래인재를 바라는 대학과 수험생의 현실은 상당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초·중·고등학교를 겪는 12년 동안, 엄청난 양의 지식 쌓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고3이 되어 있다. 수험생이라는 명찰을 달고 입시 무대 위에서 4차 산업사회와 미래인재에 대한 자기 의견을 말과 글로 밝혀야 하는, 상상만으로도 난감하고 아찔한 상황이다. 교육과 입시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낼 창의적 사고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고3이 된 수험생은 논술과 구술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부터인가 거의 모든 영역의 배움터에 적용되고 있는 조기 선행학습으로 이것들을 준비했어야 할까? 논술과 구술을 유치원 시절부터 선행학습 한다는 이야기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한국의 근황이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시간이 없기에 당연히 어린 시절에 다져 놓아야만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마저 심심찮게 들려오는 요즘이다. 여기서 매우 궁금한 것은, 그렇게 어려서부터 선행학습으로 논술과 구술을 준비한 학생은 고3이 되어서 정말 수월한 입시를 치룰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정적으로 그렇게 마스터할 수가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말하고 쓰는 능력은 특정한 학습 범위가 있어서 완료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거늘 어떻게 무슨 수로 선행학습으로 끝을 낸다는 말인가.

 

입시를 위한 글쓰기는 일종의 기능이다. 직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연습을 통해 그 쓰기 능력의 차이가 좌우될 수 있지만 그 깊이를 수량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다만, 여러 번 써 본 사람이 익숙하게 쓸 수 있고 능숙하게 다듬을 줄 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처음부터 재능이 있어서 잘 하게 되는 일도, 조기선행학습으로 마스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말과 글은 생각에서 나온다. 텅 빈 냉장고에서는 요리의 재료를 꺼낼 수조차 없는 법이다. 많이 읽은 사람이 반드시 잘 쓰는 것은 아니지만, 잘 쓰는 사람 치고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떻게든 생각의 주머니가 가득한 사람이 말로든 글로든 풀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빈곤한 상태에서 걱정만 앞세우는 경우를 상당히 많이 본다. 사소한 것에서도 풍부한 생각의 꺼리를 마련해내는 습관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생각을 참 많이 한다. 수면시간 등 무의식 상태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생각은 물 흐르듯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한다. 하지만 말과 글을 표현해야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조차도 때로는 텅 빈 상태보다는 훨씬 바람직하다.

 

쓰기가 두렵다면 먼저 말로 풀어보고, 말하기가 꺼려진다면 글로 적어 보는 그 모든 경험이 시뮬레이션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모든 말과 글은 생각을 발췌하고 요약하는 데서 출발한다. 발췌는 선택이고 요약은 축약이다. 광범위한 영역에서 적합한 것을 가려 나열하고 핵심을 뽑아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표현되는 것은 말과 글이 동일하다. 즉, 논술이든 구술이든 면접이든 제 각각 준비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간장종지에는 국을 담지 못한다. 국이 넘쳐버려서 담을 수가 없다. 반대로 국그릇에 간장을 담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담을 이유도 없다. 대학생이 된 후, 자기의 생각을 담아내려 할 때, 생각을 담을 주머니의 크기 자체가 아동기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라면 고등학교 교육과정까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넘쳐 흘러버리고 만다. 아무리 담으려 애써도 담길 수 없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다. 그릇 자체의 크기 문제인 것이다. 성장 과정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국어력을 갖춘 학생은 논리적인 사고력을 끊임없이 담아야 했을 것이기에 생각을 담는 주머니의 넓이도 지속적으로 확장되었을 것이다.

 

논리의 바탕은 사고력에 있다. 사고력이 있어야 논리적인 체계를 가진 뇌의 구조가 형성된다. 오로지 입시를 위해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에 의미를 두고 연습하는 것은 사고의 깊이를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오히려 대학 입학 이후에 말하고 글쓰기는 더욱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레포트를 쓰거나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일에서부터 취업을 위한 이력서 작성, 면접까지 결코 피해갈 수 없이 갖추어야 할 핵심 능력이다. 단기적으로 준비한다는 얄팍함보다는 사고의 폭과 깊이를 고려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가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접근 태도일 것이다.

 

수능이 한 달 남았다. 결전의 날을 한 달 앞에 두고, 수험생은 마음을 잘 다스려야만 한다. 마음 다스리기가 어디 그리 쉽냐고 하지만 사실 가장 간단한 것이 그것이다. 다른 것은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없고 예상할 수조차 없지만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닌가. 유일하게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다. 내 마음의 중심을 단단하게 하고 나머지를 바라보자. 중심을 잡은 마음의 뿌리가 견고하다면 다른 요인들은 깃털처럼 가볍게 여겨질 것이다. 입시의 가장 큰 적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모르는 것이 나오면 어떡하지?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할까? 불합격하면 어쩌나? 전부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대한 부정적인 상상으로 안한 불안함은 커져만 간다. 어차피 반반이다. 아는 것이거나 모르는 것이거나. 익숙하거나 낯설거나. 입시는 지식의 양과 질을 평가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수학(修學)을 할 만한 마음 자세 또한 큰 틀에서 보면 평가의 범주에 들어간다.

 

먼 옛날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왕관을 쓰고는 싶지만 무거운 것을 견딜 마음이 없다면? 왕관은 욕심나지만 무거운 것을 버틸 능력이 없다면? 아쉽지만 왕관에 대한 욕심은 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기나긴 시간동안 모든 수험생은 각자가 그려 온, 바로 그 왕관을 쓰기 위해 나름의 역사를 차근차근 밟아왔다. 극한의 심적 고난이 다가오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자세로 기꺼이 감내해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왕관의 주인이 되기 위한 당연한 무게이다.

 

국어융합교육콘텐츠연구소 한결可치 대표 김한결 cozy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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