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공인은 물론 세계 최고 전문가 인증서까지
국제 공인은 물론 세계 최고 전문가 인증서까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3.06.23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계 수리 전문가 다오반유

73세 시계 수리공 다오반유(Dao Van Du)씨는 작업하는 책상 앞에 앉아 아주 정밀하고 작은 시계 부품들에 집중한다. 리남데(Ly Nam De) 지역 32번지 집에는 크고 작은 많은 종류의 전자시계들이 걸려있다. 그는 재주 많은 기술공이지만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오반유 씨의 유년기

어렸을 때부터 그는 총명하여 많은 것을 잘 이해하였는데, 특히 시계의 기능과 시계에 대한 것들에 관해서는 통달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수업시간 외에는 시계 부품 조립 및 수리 작업을 하는 시계수리공인 아버지들 도왔다. 16~17세쯤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경력이 많은 기계공들도 고치지 못한 큰 시계 하나를 혼자 힘으로 수리했다. 조금 더 성장했을 무렵 교육 분야 쪽으로 가려고도 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고장 난 시계들을 수리하는 일이야 말로 본인의 적성에 가장 잘 맞고 흥미를 느껴 일에 푹 빠질 수 있는 일이라고 알게 되었다.

시계를 수리하는 일은 급한 마음을 갖지 않고 늘 침착하게 고장을 일으킨 원인을 찾고 이해하며 그것을 해결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몇 시간이면 고칠 수 있는 시계가 있는 반면, 몇 일 동안 붙들고 있어야만 수리가 가능해서 기계공들을 힘들게 하는 시계들도 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개의 시계도 고치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공공장소의 시계들은 그의 손을 거쳐

뛰어난 실력의 시계 수리공으로 알려진 그는 1960년, 국가에서 처음으로 시계 합작회사를 설립했을 때 기술 책임자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의 전문 기술은 5/7급으로 지금까지 가장 높은 등급을 기록하고 있다. 젊고 총명하며 재주 있었던 그는 수백 명의 숙련된 시계 수리공들을 가르치는 일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거리에 걸어 놓는 공공장소 시계 시스템을 확립하는 일에 참가해 항야(Hang Da) 시장, 동쑤언(Dong Xuan) 시장, 서(Sở) 사거리, 그리고 나중에는 하노이 우체국에 있는 시계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그때는 누구나 시계를 살 돈 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놓여 있는 시계 시스템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5년, 그는 하노이에서 시계 부품조립과 수리 전문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노이 기술공인센터에서 과장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의 기술공으로서의 입지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성공들은 그의 피나는 노력에다 그의 천성적 재주가 더해져 가능했다.



국제적으로도 최고의 기술자

시계와 함께 살아온 그의 60년을 돌아보며 많은 추억 속의 사건들에 그는 감동과 자랑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스위스의 명문 브랜드 시계학교(WOSTEP)에서 2번 연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1979년, 국가와 하노이시 인민위원회가 지원하여 공부를 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기술을 접한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경연을 벌여 본인의 기질과 재능을 증명해 보였다. 그는 그때까지 몇 십 년간 그 누구도 받지 못했던 최고 점수를 기록하며 졸업했다.

11년 후, WOSTEP에서 한 번 더 그를 스위스로 초청했다. 그는 국제 시계회의에 참가하고, 큰 규모의 시계 공장에서 기능공들을 양성하는 강의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세계에서 시계 명품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라도(Rado), 오메가(Omega), 론진스(Longines)와 같은 회사로부터 "이 사람은 시계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이며, 시계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자세하게 이해하는 사람임을 증명함" 이라고 쓰여 진 인증서를 받았을 때의 그 감정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시계 왕국 스위스에서 7개의 수료증을 받아 아시아에서 시계 분야의 가장 많은 졸업장을 가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뛰어남은 국제적인 전문가 친구들로부터 '작지만 재능이 많은 베트남 사람' 이라는 인정과 존경을 받는 계기를 마련 해 주었다. 그는 그곳에 남아 일하였다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슴속에 사무치던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군인무신 훈장 수여는 물론 시한폭탄 제조도

시계 수리공 외에도, 그는 병점, 코만도 특별기습 부대의 일원이었으며, 전쟁터에 나가기 하루 전 군복을 벗기는 했지만, 1968년 군인무신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미군과 전쟁을 벌이던 1968년부터 1972년까지 그는 국가 간부로서 폴조(Poljot) 시계로 시한폭탄을 만드는 임무를 맡기도 했었다. 그 임무의 막중한 중요성을 알게 된 그는 일주일간 연구 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의 총명함과 시계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으로 시한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정확히 약속한 시간 내에 이루어진 이 결과물은 유명한 전투에서 사용되어 승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시계와 함께 한 60여 년 이제 아들에게 전수

올해 그의 나이는 73세로 여전히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작은 부품들을 만지며 일을 하고, 그의 아들인 다오부하이(Dao Vu Hai 씨에게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이(Hai)씨는 그의 아들이자 시계수리공이다. 그는 "매일 시계를 고칠 때마다 더 건강해지는 느낌이에요, 한곳에 앉아있지 않고 움직이면 더 힘드니까" 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이 많은 수리공이 조용히 몰두하여 나사, 작은 바늘 등을 집어 올리며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시계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나통신사_글: 하안(Ha Anh)기자, 사진: 쩐탄지앙(Tran Thanh Giang)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