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작곡가 베르디 탄생 200주년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 탄생 200주년
  • 베한타임즈
  • 승인 2013.03.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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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싸이’가 어느 기자 회견에서‘강남 스타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에 소감을 표현했는데 자신도 무척 얼떨떨하다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볼 때 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시대의 필요가 맞물려서 발생되는 돌연변이 스타 해프닝은 현대의 ‘싸이’뿐만이 아니었다.

베르디의 성장

   올해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가장 비중있는 작곡가 베르디 (주제페 포르투니노 프란체스코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년 10월 10일-1901년 1월 27일)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모짜르트와 같은 천재, 신동의 대명사도 있지만 음악 역사 속에 남는 위대한 인물 중 당시대에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기득권의 후예가 아닌 엉뚱한 아웃사이더가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베르디는 어릴 때 부터 음악적인 재능으로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거나, 정규 음악 수업을 받지도 못했다. 베르디가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시험을 칠 당시, 시험관들은 그가 이미 나이가 많고 음악 기법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탈락시켰다.

 그 사회의 주류라는 것은 타고난 환경과 학습과정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정확한 매뉴얼을 익히고 성공의 곧은 경로에 있는 서클을 의미한다. 베르디 당시 주류 음악가들은 베르디가 작곡이니 음악활동을 한다고 동분서주하고 다니는데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교습으로 작곡공부를 한 그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올 기회를 노렸다. 주류에 선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은 대중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거대한 시간의 흐름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대중은 예측하지 못한 사람이 놀라게 하는 것을 좋아하며 열광을 한다. 그리고 역사 속에 자취를 남기게 한다

시대가 만들고 대중이 사랑한 대 작곡가 

   1842년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압박하에 완전한 독립국을 열망하고 있었다.이 시기에 작곡한 베르디의 애국적인 오페라‘제1회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잔 다르크1845’,‘레냐노의 전쟁1849’등은 이탈리아인을 열광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후에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어 1861년 통일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이 되는 등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기도한다.

아뭏든 애국적 오페라에서 큰명성을 얻은 베르디는 이제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라트라비아타(춘희)1853’,‘리골레토1850’,‘일트로바토레1853’,‘아이다1871’등 세기의 걸작들을 내놓는다. 그의 오페라 음악의 특징은 가극을 구성하는 극적 효과가 커서 대중이 쉽게 감동하고 받아들이는 매력에 있다.

   그 와중에도 보수적인 음악계의 시각은 여전히 그의 음악을 단순하고 드라마틱한 일반 민중의 취향만을 반영한다고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역사를 이끄는 대중의 뇌리에는 마음에 파고 드는 심플하고 뚜렷한 멜로디만이 각인되니 어쩌겠는가.

   그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유명한 ‘여자의 마음’은 질다를 유혹하려는 만토바 백작이 부르는 노래이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눈물을 흘리며 방긋 웃는 얼굴로 거짓말로써 속일 뿐이리.

   곱추 리골레토는 질다가 자기 딸인지도 모르고 바람둥이 만토바 백작이 그녀를 희롱하도록 돕는다. 복수로써 리골레토는 만토바 백작을 죽이려다 결국 그의 꾀에 넘어가 자기 딸을 죽이고 만다. 비극적이고 천박한 내용이지만 억눌린 서민의 질곡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 노래는 1851년 베네치아에서 첫 상연이 되자마자 온 시민들이 따라 불렀다 한다.

(호치민 음대 주은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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