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베트남 수교 사절단 이야기
1992년 베트남 수교 사절단 이야기
  • 베한타임즈
  • 승인 2012.12.1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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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만(당시 외교부 서기관) 인터뷰


   1992년 9월 베트남과의 수교를 타진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대표해 6명의 사절단이 호찌민과 하노이를 방문한다. 사절단 단장은 김석우 아주 국장(전, 통일부 차관)이 맡았고, 문하영 서기관(현, 재외동포대사), 배재영 서기관(현, 외교통상부 의전장), 정병만 서기관(현, 청원오가닉 대표), 적십자사를 대표해 1명, 호찌민 코트라 관장이 참석하였다. 이중 호찌민시에 이미 와 있던 코트라 관장은 현지에서 함께하였다. 수교를 타진하기 위해 방문한 사절단은 호찌민에서 3일, 하노이에서 6일을 머무르게 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절단의 긴장된 방문을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외교관계가 다시 형성되는 성과를 만들게 된다. 우리는 이들의 숨은 노력 덕분에 올 해 수교20주년이라는 뜻 깊은 행사를 갖고 있다.

   수교 사절단으로 참석했던 정병만 서기관이 수교 후 20년 만에 다시 호찌민 시를 방문했다. 한베 수교 20주년 행사장에 참여한 “옹킴”의 김치행사를 보기 위함이었다. 공직생활을 퇴직한 후 그는 청원오가닉이라는 김치 회사를 운영하여 꽤 성공하였다. 그는 이제 사업가로서 세계김치연구소와 함께 김치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기자가 정병만 대표를 만난 자리는 공교롭게도 한베 수교 20주년 행사장이었다. 누구보다도 감회가 깊을 것이다.

기자: 1992년 9월 수교 사절단으로 방문하신 후 베트남에 자주 오셨었나요?
정병만: 20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다시 호찌민을 방문하였습니다. 베트남에 와야 할 특별한 계기가 없다가 이번에 “옹킴”의 김치행사를 보기 위해 세계김치연구소 김재환 단장과 함께 방문한 것입니다.

기자: 20년 만에 다시 방문하신 느낌이 어떠세요?
정병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느낌입니다. 일단 거리가 깨끗하게 변했구요. 도로에서 자전거가 없어졌습니다. 당시에는 도로 가득히 자전거가 있었고, 오토바이는 드물게 있었습니다. 차는 더욱 보이질 않았죠. 특히 흰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여학생들의 물결은 장관이었습니다.

기자: 수교 사절단이 베트남을 방문하게 된 배경을 말씀해 주십시요.
정병만: 베트남이 수교를 희망하는 메시지를 먼저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기에 상당한 심리적 부담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옛날에 일본에게 요구했듯이 수교하는 전제 조건으로 전쟁 피해를 위한 배상금을 요구하지나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적십자사에서 한 명의 사절단이 참여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적십자사를 통한 선린우호적 지원과 봉사를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gesture) 같은 것이었습니다.

기자: 왜 이렇게 베트남 정부가 대한민국과 수교하는 것에 적극적이었을까요?
정병만: 수교가 있기 전 당시 코오롱 상사가 베트남으로부 터 오징어와 석탄 등을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국 기업이 15개 정도 나와 있었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코트라가 호찌민시에 파견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다 하더라도 양국간의 경제 관계는 아주 미미한 상태였습니다. 호찌민에 와 보니 한국 식당이 하나도 없어 식사하기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경제적 관계가 싹트고 있는 상황에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개발 경험을 배우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개방 직후인 상황에서 베트남이 벤치마킹하고 싶은 나라는 한국이었습니다. 아주 빠른 시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했고, 여러 가지 문화 조건이 같기 때문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자: 수교 사절단이 베트남을 방문했던 당시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정병만: 호찌민 공항에 내리니 시골 버스 터미널에 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경직되어 있었고 한산하고 싸늘했습니다. 호찌민에서는 제대로 된 호텔이 없어서 사이공 강에 띄워 놓은 플로팅 호텔에서 머물렀습니다. 잠 자는 사이에도 배가 흔들흔들 하였습니다. 정말 모든 게 한심할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기자: 수교를 위한 회담 진행은 어떠했습니까?
정병만: 방문 첫날 베트남 역사 박물관으로 안내되었는데, 가 보니 우리 청룡부대가 베트남 사람을 죽이는 사진이 딱 보이는 게 아닙니까. 이것을 보는 순간 식은 땀이 나며 일부러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을 보니 수교는 어렵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구찌 터널에 데리고 갔습니다. 관광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이런 것만 보여주는 것이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식사 시간에 “우리는 과거를 잊었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한국과 수교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It doesn’t matter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야 이거 대단한 사람들이로구나 대국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 배상 청구니 이런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노이에서는 우리가 미리 호텔을 예약해 놓았는데도 우리 일행을 국빈 대우로 영빈관에 머물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고 정성을 들인거죠.

기자: 당시 재미난 에피소드 같은 것 있었습니까?
정병만: 그 당시 통역은 김일성 대학에서 유학한 베트남 사람이었는데, 북한말씨였습니다. 이 통역이 우리에게 “저녁식사에 당고기(개 고기의 북한 말) 좀 드실 랍니까?”라고 묻는 거에요. 개고기를 낸다는 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라고 김석우 단장님에게 물었죠. 김 단장님이 “우린 손님으로 왔는데 주인이 대접하겠다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지 않겠냐” 라고 하셔서 그날 개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베트남도 개고기를 좋아하는구나 알았죠.

기자: 수교를 위한 방문 이후 다음 절차 진행은 어떠했습니까?
정병만: 호찌민 방문 당시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민국 정부가 사용하던 대사관 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현재는 총영사관으로 사용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리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베트남 정부가 예전에 서울에서 사용하던 대사관 자리(한남동)와 대사 관저(삼청동)를 베트남 정부에 제공하는 문제를 검토했습니다. 사실 삼청동에 있는 대사 관저는 황금 땅이었습니다. 가치로 따지면 우리측 손해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로 논의가 있었지만, 두 나라 간 외교관계 정상화를 위해 우리가 양보한 것입니다. 외교 협약 문서에 서명하는 것은 우리 사절단이 다녀간 후 두 달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속전속결이었습니다. 그만큼 베트남 정부가 다급하게 서둘렀습니다. 그 덕분에 대한항공이 크게 덕을 보았지요. 당시 대한항공은 베트남 취항을 강렬하게 희망했는데 외교관계가 없어 어려웠었지요. 우리가 다녀간 후로 두 달 만에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대한항공 사장님으로부터 우리가 대접 한번 받았습니다.

기자: 이제 사업가로 변신하셨습니다. 김치 얘기를 해 주십시요.

정병만: 공직에서 퇴임한 후 우연히 김치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저희 회사 제품이 ‘김치 품평회’에서 우수 상을 받는 등 한국에서는 김치로 꽤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김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리 이동 시간 때문에 한국에서 김치를 유럽으로 수출할 수 없습니다. 거점 기지가 필요한데, 베트남이 적합한 지역입니다. 중국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중국 식품을 믿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을 거점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베트남은 김치나 무우가 생산되고 있고, 김치를 좋아하는 분위기도 있어 아주 적합하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옹킴’ 같이 자생한 로컬 김치생산업체도 있어 안성맞춤입니다. 내년에 베트남에서 대대적인 김치페스티벌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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