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유교의 상징, 문묘(VĂN MIẾU)
베트남 유교의 상징, 문묘(VĂN MIẾU)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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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는 베트남어로 반미에우(Văn Miếu)또는 반탄미에우(Văn Thánh Miếu)로 불린다. 문묘는 공자(Khổng Tử)를 모시는 사당이자 유교의 상징이다. 공자는 유교의 창시자이며 영원한 스승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동아시아 지역은 수천 년 역사 속에 유교가 자리하고 있다. 베트남을 포함한 중국,일본, 한국 등 거의 모든 동아시아 국가에는 문묘가 있다. 문묘는 베트남 유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불교가 흥성해 국교의 위치를 지키던 시 기인 베트남 리(Lý) 왕조 시대, 리탄똥(Lý Thánh Tông) 왕은 1070년 공자를 모시고동시에 황태자의 학습을 위한 장소로 문묘 를 세웠다. 1076년 리(Lý) 왕조는 문묘 옆에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국자감(Quốc Tử Giám) 학교를 설립하였다. 애초부터 문묘는 유교 창시자를 모시기 위한 곳뿐만 아니라 국가, 왕조를 위한 인재 양성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 후에도 베트남 유교의 발전과 함께 문묘는 점차 중시되어 갔고 규모를 넓혀갔다. 후 시대인 쩐(Trần) 왕조는 국자감(Quốc Tử Giám)의 명칭을 국가학술연구기관(Quốc Học Viện)이라고 변경했고 왕족 자제뿐만 아니라 백성 중 출중한 인물들까지 양성했다.

허우레(Hậu Lê) 왕조부터 응우옌(Nguyễn)왕조까지 유교는 사회적 영향을 끼쳤고 문 묘는 수도뿐만 아니라 많은 성(tỉnh)에도 설립되기 시작했다. 특히, 응우옌(Nguyễn) 왕조(1802-1945) 시대에는 후에(Huế)의 문묘 외에도 북부부터 남부까지 각 성(tỉnh)에문묘를 세웠으며 심지어 현(huyện)이나 더작은 행정 구역에도 문묘를 설립했다. 면적으로 보자면, 베트남에서는 가장 크고 상징적인 문묘가 2곳 있다. 바로 하노이 (Hà Nội)시 탕롱(Thăng Long) 문묘와 후에(Huế) 문묘다.

하노이(Hà Nội) 탕롱(Thăng Long) 문묘는리(Lý) 왕조부터 쩐(Trần), 호(Hồ), 레서(Lê Sơ), 막(Mạc), 레쭝흥(Lê Trung Hưng) 왕조를 거쳐 응우옌(Nguyễn) 왕조 시대에는 박탄(Bắc thành) 문묘가 되었고, 그 후 하노이(Hà Nội) 문묘가 되었다.

탕롱(Thăng Long) 문묘는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문묘다. 이는 여러 세대를 걸쳐 많은 베트남인의 노력과 지혜가 결합된 결과물이다. 문묘와 국자감을 모두 합하면 5.5헥타르에 가까운 면적이 나온다. 건물들은 세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국의 산동성 취푸의 문묘를 일부 모방했다.  하지만 하노이(Hà Nội) 탕롱(Thăng Long) 문묘는 더 소박하고간결한 베트남 전통 건축 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탕롱(Thăng Long) 문묘 입구 쪽에는 반쯔엉(Văn Chương) 호수가 있고, 정 가운데에는 낌쩌우(Kim Châu) 육지를 볼 수 있다.예전에는 경치 감상을 위해 낌쩌우(Kim Châu) 위에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건축을 살펴보면, 겉에는 벽돌담이 둘러 쌓여있고, 내부는 기능에 따라 5곳으로 나뉘어진 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장소는 레막(Lê Mạc)왕조시대 (1442-1779) 인물들의 82개 묘비가 놓여진 묘지와 공자를 모시는 곳이다.

후에(Huế) 문묘는 응우옌(Nguyễn) 왕조시대 때 쫑(Đàng Trong) 땅을 할거하고 개척하러 갔던 시기부터 존재했었다. 1808 년 자롱(Gia Long) 왕은 흐엉(Hương)강 근처, 수도와는 4km거리에 떨어진 흐엉호 (Hương Hồ)지역에 문묘를 지었다.

문묘는 약 3헥타르의 규모로 20개에 가 까운 건축물이 있었다. 린띤몬(Linh Tinh Môn), 반미에우몬(Văn Miếu Môn), 다이탄몬(Đại Thành Môn), 문묘궁전 등이 있다. 두 줄로 나열된 32개의 묘비에는 민망 (Minh Mạng) 왕조부터 카이딘(Khải Định)왕조시대 (1822-1919)까지 있었던 39번의 국가시험에 급제한 293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후에(Huế) 문묘 바로 옆 서쪽에는 국자감이 있다. 국자감은 1803년부터 지어졌 고 국자감의 옛 명칭은 독혹드엉(Đốc Học Đường)이다. 1908년에는 유이떤(Duy Tân)왕이 국자감을 호앙탄(Hoàng thành) 동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국자감은 티에우찌 (Thiệu Trị) 왕의 지시에 따라 후에(Huế) 수도의 아름다운 경치 중 한 곳이라고 불렸 다. 국자감의 북쪽 방향에는 카이탄뜨(Khải Thánh Từ), 공자 부모를 모시는 터가 있다.반탄(Văn Thánh)의 동쪽은 보미에우(Võ Miếu)로 무공이 뛰어난 고급관료들과 무관들을 모시는 곳이 있다.

무관들의 이름을 새긴 묘비도 볼 수 있다. 유교는 지난 천년 동안 베트남의 학자, 학문을 배우는 계층들의 지식, 품행을 쌓고 단련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양의 군주제도 아래서 문묘-국자감은 유교의 문화, 정신, 학문을 대표한다. 동시에 유교의 성인들을 모시며 인재 양성, 교육의 장소였다.

하노이(Hà Nội) 탕롱(Thăng Long) 문묘는국가 특별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82개의 묘비는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 기록유산(2010년)이다. 후에(Huế) 문묘는1993년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뿐만 아니라 하이즈엉(Hải Dương) 마오디엔(Mao Điền) 문묘, 흥옌(Hưng Yên) 씻당(Xích Đằng)문묘, 박닌(Bắc Ninh)문묘, 동나이(Đồng Nai) 쩐비엔(Trấn Biên)문묘 등각 지역의 문묘 또한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1484년 레탄똥(Lê Thánh Tông) 왕이 탕롱(Thăng Long) 문묘에 묘비를 세우라는 지시에 턴년쭝(Thân Nhân Trung) 대신은 아래와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덕과 재주는 국가의 원기이다. 왕성한 원기는 번영하는 국가의 세력이고, 쇠약한 원기는 비천하고 약한 국가의 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고 국가의 원기를 육성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베트남통신사-TTX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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