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탕롱(Thang Long) 황성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탕롱(Thang Long) 황성
  • 베한타임즈
  • 승인 2013.04.15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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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롱-하노이 황성 유적지는 총 면적 1만 8395헥타르로, 황지에우(Hoang Dieu) 18번가 유적지를 비롯해 하노이 깃발 탑, 도안몬(Doan Mon)문, 낀티엔(Kinh Thien)궁, D67번지 가옥, 허우러우(Hau Lau) 전각 등, 응웬(Nguyen) 왕조 때의 성벽과 8개의 성문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탕롱-하노이 황성 유적지는 동서남북 4방향의 길로 둘러싸여 있으며, 구체적으로 북쪽의 판딘풍(Phan Dinh Phung)길, 남쪽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길, 동쪽의 응웬찌픙(Nguyen Tri Phuong)길, 서쪽의 황지에우길 및 국회의사당 건물이 있다.


    탕롱-하노이 황성의 중심부는 지난 2010년 7월 31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Brasilia)에서개최된세계문화유산(UNESCO) 회의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의 등재기준은 3가지 요건이이며, 탕롱-하노이 황성은 이들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첫째, 오랜 문화교류의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로서의 독자적인 틀을 만들기 위해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많은 학설, 사상들 및 외부문화를 받아들인 곳이어야 한다. 둘째, 오랜 전통문화를 간직해야 한다. 탕롱-하노이 황성은 홍하 삼각주 지역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의 유일한 오랜 전통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셋째, 세계와의 교류와 관계 속에서 국가적으로 중대한 역사 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장소이여야 한다.

   지난 2010년 10월 1일 탕롱-하노이 1000년 기념행사 개막식에서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 유네스코 사무총장은 하노이 시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인증서를 수여했다.

 탕롱 황성의 역사

   리꽁우언(Ly Cong Uan)왕은 왕좌에 앉은 후 1009년 리(Ly)왕조를 설립했다. 이듬해 7월 왕은 수도를 호아르(Hoa Lu)에서 다이라(Dai La) 성으로 옮기라는 천도령을 내렸다. 수도를 옮긴 후 리꽁우언 왕은 급히 탕롱성을 지어 1011년 초 이를 완공한다. 탕롱성은 성곽중심 모형으로 건설되었으며, 3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성은 라탄(La Thanh) 혹은 낀탄(Kinh thanh)으로 불리며, 수도 전체를 에워싸고 홍(Hong)강, 또릭(To Lich)강, 낌응우(Kim Nguu)강에 둘러싸여 있다. 낀탄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곳으로, 이곳 중심에 위치한 두 번째 성인 황탄(Hoang Thanh)성은 주요 조정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가장 안쪽에 있던 성은 뜨깜탄(Tu Cam Thanh)이라고 불렸으며, 이곳에는 오로지 왕과 왕비를 비롯해 소수의 첩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쩐(Tran)왕조 시기에는 계속해서 탕롱성을 보수하고, 추가적인 건설 작업을 했다. 이어서 레(Le)왕조 시기에는 황궁이 세워졌고 확장되었다. 1516년부터 1788년까지 막(Mac), 레쭝흥(Le Trung Hung) 왕조 때는 여러 번 파괴되었고, 1789년 초에 꽝쭝(Quang Trung)왕이 수도를 푸쒄(Phu Xuan)으로 옮기며 탕롱성은 북쪽의 방어시설, 박탄(Bac Thanh)으로만 사용되었다.

   또한 응웬(Nguyen) 왕조 시기에는 탕롱성에 남아있던 일부 건축물들이 새로운 성을 건설하기 위해 옮겨져 낀티엔(Kinh Thien)궁과 허우러우(Hau Lau)궁만이 남겨져 응웬(Nguyen)왕이 박탄(Bac Thanh)을 방문할 때 머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1805년, 쟈롱(Gia Long)왕은 하노이에 작은 규모의 프랑스 건축양식인 보방(Vauban)식으로 새 성을 짓기 위해 탕롱성의 벽을 허물었다.1831년, 행정개혁을 시행하며 민망(Minh Mang)왕은 수도의 이름을 탕롱에서 하노이로 바꾸었다. 이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면서 하노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 연합의 수도로 정하면서 하노이성은 관공서와 군사기지 건설이라는 명목 하에 파괴되었다. 하지만 1954년 베트남 군대가 수도를 다시 차지하면서부터 하노이성은 국방부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탕롱-하노이 황성의 중심부는 탕롱시대 이전의 다이라(Dai La)성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10세기가 넘는 역사를 한 권의 책처럼 담아내고 있다.




 탕롱 황성의 대표적 관광지들

1.황지에우 18번가 유적지

   이 유적지는 다양한 시대의 유적이 혼합된 곳이다. 이 유적의 가장 아래인 최하층은 까오비엔(Cao Bien)시대와 등(Duong) 왕조시대 때의 다이라(Dai La)성의 동쪽 일부분이었고, 그 위층은 리(Ly), 쩐(Tran) 왕조시대의 궁전으로 사용되던 곳이며, 그 위 쪽은 레(Le) 왕조 때 동궁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가장 위쪽은 19세기 하노이 성 요새 중심부의 일부분이었다.

2.깃발 탑

   하노이 깃발 탑은 1812년 쟈롱(Gia Long) 왕조 때에 축조된 유적이다. 이 탑의 높이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를 포함해 60m이다. 기단부의 면적은 3개의 단을 포함해 2007㎡로, 벽은 모두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땅에서 두 번째 단과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단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각기 탑 동쪽과 서쪽에 있는 18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세 번째 단에는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문이 나있다.

3.도안몬(Doan Mon), 단문

   단문은 황성 중앙 출입문으로 돌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입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가장 바깥쪽 문은 땀몬(Tam Mon)으로 1812-1814년경 응웬쟈롱(Nguyen Gia Long) 왕조 때 깃발 탑을 짓기 위해 파괴되었다. 2002년 베트남 고고학계는 단문 내부 발굴 작업을 허락받아 쩐(Tran) 왕조 때의 마찻길을 발굴했으며, 이 발굴 작업을 계속하면 단문부터 낀티엔(Kinh Thien) 궁까지의 길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낀티엔(Kinh Thien)궁

   낀티엔궁은 하노이성의 역사적, 지리적 중심지로, 유적지의 중심부에 위치해있다. 낀티엔궁 앞쪽으로는 단문과 하노이 깃발 탑이 자리잡고 있다. 낀띠엔궁 뒤편으로는 공주의 전각 (Hau Lau)과 북문이, 동쪽과 서쪽으로는 성벽과 작은 성문들이 있다. 하지만 낀티엔궁은 이제 궁은 사라지고, 궁터만 남아있다.

5.D67번지 가옥

   D67번지 가옥은 총사령부의 본부로, 국방부, 정치부, 중앙관리들이 모여 베트남 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1975년 총공격, 호치민운동 등 역사적인 결정들을 한 장소로 유명하다.

6.공주의 전각(Hau Lau)

   띤박(Tinh Bac) 전각은 낀티엔(Kinh Thien)궁 뒤쪽에 있는 전각으로 북쪽 행궁의 평온함을 지키기 위해 풍수적인 의도로 지어졌다. 그에 따라 이름도 띤박(Tinh Bac)이다. 북쪽의 고요한 궁으로 지어졌으며, 허우러우(Hau Lau)라 불리며, 뒤쪽 궁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곳이 응웬(Nguyen)왕이 하노이로 순행 시 동행해 왔던 궁녀들이 머물며 쉬던 공간이라고 하여 공주의 전각으로 불리기도 한다.

7.북문(Bac Mon)

   북문의 한문 이름은 정북문(正北門)으로, 하노이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응웬(Nguyen) 왕조 시대의 문이다. 성문의 토대는 레(Le) 왕조 때 세워졌으며, 북문의 바깥쪽 벽에는 돌로 만든 문패가 있다. 이 문패에는 1882/04/25라고 새겨져 있고, 바로 옆에 2개의 내려앉은 자국들이 있는데, 이것은 1882년 하노이성이 홍(Hong)강에 있던 프랑스 전투함이 쏜 포탄에 맞은 자리이다.

8.응웬(Nguyen)왕조 때의 성벽과 8개의 행궁 문

   낀티엔(Kinh Thien)성을 에워싸고 있는 성벽은 벽돌로 지어졌으며, 8개의 성문은 남쪽의 도안문(Doan Mon)성 양쪽에 2개, 북쪽의 공주의 전각(Hau Lau)뒤쪽에 2개, 동쪽의 응웬찌픙(Nguyen Tri Phuong)길로 연결되는 문과 서쪽의 황이우(Hoang Dieu)길로 연결되는 문, 그리고 낀티엔성 양쪽에 하나씩 세워져 있다.

9.탕롱 황성의 지하 벙커

   지하 벙커는 탕롱 황성 내 작전기지 건물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휘부가 작전을 세우던 곳이다. 오랜 기간 출입을 금지했으나,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환풍기와 전기시스템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많은 물품과 자료들을 수집해 전시하고 있다.

   이 지하벙커의 개방은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미군에 대항해 항쟁하던 시기의 베트남 역사 한 부분을 보다 잘 알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건설된 이 비밀 지하 벙커는, 반은 지상에, 나머지 반은 지하에 위치한 구조로 약 1000㎥에 달하는 콘크리트 블록으로 구축되었다. 천장의 두께는 1.4m, 벽의 두께 40cm이다. 가장 현대적인 지하 벙커로 평가 받고 있으며, 먼지필터, 공조 시스템 등이 갖추어져 있어 원폭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졌다. 65㎡의 지하 면적은 작전 회의실, 숙직실, 유독성 물질을 해독 및 정화하는 환기구(공기구멍)가 있는 방까지 3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베트남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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