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이순흥’ 회장님을 추모하며
‘파란만장 이순흥’ 회장님을 추모하며
  • 베한타임즈
  • 승인 2023.10.0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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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1~22일 양일간 호치민한인회 주관으로 故 이순흥 회장님의 장례식이 호찌민시 1군에 있는 한인회관(총영사관 별관) 2층 강당에서 진행되었다.

1938년 1월 3일 서울서 태어난 이순흥 회장님은 덕수상고를 거쳐 한국어대학교 영어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분은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었다. 1968년 2월 16일에는 미8군 잉여물자를 취급하던 버클레이사의 에이전트로 고철 검품을 하러 베트남 빈호와(Vinh Hoa)에 오게 된다. 이것이 베트남과의 운명이 되었다. 나중에는 순흥통상(주)을 설립하여 고철 고물 수거 사업으로 꽤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는 순간 탈출에 실패하여 교민 200여명과 함께 사이공에 갇히게 된다. 이때부터 베트남 정부로부터 출국 허가를 받는 1981년 5월 31일까지 만 6년간 200여명의 교민 자치회장으로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된다. 겉으로는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며 교민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자치회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여성과 위장 결혼까지 하면서 베트남 교도소에 구속되어 있던 이대용 공사, 서병호 총경, 안희완 영사 등을 옥바라지하는 대한민국 민간 스파이였다. 위장 결혼한 베트남 여성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교도소를 오갈 때 교민들 사이에서 “이순흥씨가 바람났다”라는 오해도 받았지만, “극비리에 진행되는 옥바라지니 대놓고 이를 항변할 수도 없었다”고 토로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교도소에 갇혀 있던 모든 외교관들도 대한민국 품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81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게 되고, 1993년에는 국가 유공자로 인정 받았지만 그의 개인사는 평탄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이 개방 된 이후 잊지 못할 사이공에 다시 돌아 온 이순흥 회장님은 위장결혼했던 베트남 여성과 재회하고 진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호치민한인회 2대, 3대 한인회장으로서 또 다시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한인 행사 어느 곳에서도 제일 먼저 나타나시어 제일 앞자리에 계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분의 애국, 그분의 애민, 그분의 열정만이 우리 마음에 남아 있게 되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종각 15대 호치민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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