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의 격주기획연재> 베트남과 호치민 (9) 성난 말(4)
<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의 격주기획연재> 베트남과 호치민 (9) 성난 말(4)
  • 베한타임즈
  • 승인 2014.08.30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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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착수하다


타인(호치민 주석)은 곧 무대 공포증을 이겨내고 클럽의 주간 모임의 토론에 적극 참여하고 파리의 급진적 지식인 운동의 지도적 인물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타인은 이미 서른 살이 되었으나 그의 세상 경험은 교사, 요리, 그리고 몇 가지 막 일자리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끊임없는 학구열로 세계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노동허가증이 없어 취업을 할 수 없는 타인은 베트남 음식을 팔고 간판을 제작하고, 한문을 가르치고, 초를 만드는 등 갖가지 잡일을 했다. 결국 그는 판추찐이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수정하는 일을 얻게 되었다. 시간이 나면 국립도서관이나 소르본느 도서관을 찾아 탐욕스럽게 책을 읽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의 파리는 청치에 관심을 둔 젊은 아시아인에게는 매혹적인 장소였다. 파리는 여전히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자 정치적 중심으로서의 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급진적 인물들이 파리에 둥지를 틀고 활동했으며 그들의 데올로기 상속자들은 1차 세계대전의 야만성을 보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에 강도를 높였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지식인과 학생들은 세느강변의 카페와 레스토랑에 모여 정치를 토론하고 혁명 계획을 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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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의 파리
당시 파리는 여전히 국제정치의 중심지로서 세계각지에서 급진적 인물들이 모 여들어 토론을 하고 혁명 계획을 세우고 있어 타인의 독립운동에 좋은 토양을 제공하였다.


전쟁말기 파리에 형성된 다양한 망명 공동체들 중에서 베트남인들의 공동체는 그 숫자에서 수위를 다투었다. 그 무렵 프랑스에는 약 5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공장에서 노동을 했지만 공부하러 온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도 수백 명 있었다.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정치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은 정치적 선동에 민감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살고 있는 베트남인들의 민족적 감정이 강하기는 했지만 이것을 독립이라는 대의와 연결시키는 활동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 파리에는 판추찐과 함께 베트남인들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판반추옹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1878년 하동성에서 태어난 추옹은 법학공부를 하고 1910년 프랑스에 귀화하여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두 사람은 전쟁발발 직전 베트남 교민들의 결사를 조직했으나 별로 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베트남에서 전면봉기를 일으킬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프랑스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잠시 수감되기도 했다. 석방 후 두 사람은 독립을 위한 활동을 중단했으며 이후 10년 동안 누구도 그런 활동을 한 사람이 없었다.

응웬아이꾸옥( 阮愛國)

타인은 이런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외모가 준수한 것도 아니고 옷차림이 화려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만한 구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뚜렷한 신체적 특징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가 이야기할 때 상대의 영혼을 꿰뚫을 듯이 형형한 빛을 발산하는 검은 두 눈이었다. 어떤 사람은 타인의 강렬한 눈 때문에 자기 부인이 겁을 먹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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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세 전후의 호치민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노동자의 설움을 체득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열화 같은 학구열로 국제정세를 읽는 날카로운 안목을 키워 조국 독립 운동의 지도자 자질을 갖추고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해 여름 타인은 명성이 높은 찐과 추옹의 승인 하에 프랑스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규합하여 [안남애국자연합(Association des PatriotesAnnamites)]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조직의 지도자로 두 원로의 이름이 올라 있지만 비서를 맡은 타인이 조직을 주도해 나갔다. 타인은 이 조직에서 처음으로 응웬아이꾸옥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타인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분을 감추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50여 개의 가명을 썼는데(160여 개의 가명을 썼다는설도 있음)애국이라는 가명을 30여 년간 가장 즐겨 썼다. 타인은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여 노동계급에 속한 베트남인을 끌어 들였는데 프랑스 각지에서 일하고 있는 항만노동자들이 주축이었다. 연합은 표면적으로는 급진적 목표를 내걸지 않았다. 실제로 조직의 창립자들은 베트남인 공동체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당국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조심성을 보였다. 조직의 명칭에 정통적인[베트남] 대신에 [안남]이라는 말을 쓴 것도 이 조직이 식민지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타인은 처음부터 이 조직을 이용하여 베트남인 공동체를 인도차이나 식민지 체제에 대항하는 효율적인 세력으로 전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비슷한 조직을 만든 조선이나 튜니지 같은 다른 민족단체와 접촉하고 있었다. (듀이커의 평전에는 조선이 명기되어 있으나 당시 파리에 조선의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당시는 그런 조직을 결성하기에 좋은 시점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파리는 반식민주의 단체들에게 운동의 세계적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국회에서는 식민주의에 대한 토론이 정기적으로 벌어졌다. 당시 인도차이나 총독인 알브라사로는 1918년 4월에 하노이에서 연설하면서 베트남인의 정치적 권리가 상당히 신장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기도 있다.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 지도자들이 1919년 1월 베르사이유 궁에서 평화조약문제를 협상하고 전후 세계의 국제관계를 이끌어 갈 원칙을 제시할 때도 식민지 문제가 논의 되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모든 민족에게 자결권을 부여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14개조 선언을 통해 세계 식민지 민족들의 열망에 불을 지폈다.

<달랏대학교 한국학과 강사, 럼동성 한국관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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