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장인 응웬반바이(Nguyễn Văn Bảy)
가면 장인 응웬반바이(Nguyễn Văn Bảy)
  • 베한타임즈
  • 승인 2014.06.0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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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웬반바이 장인은 거리의 예술가로 일생 동안 바이가면(Bảy mặt nạ)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지난 20년 동안 호찌민시 사람들에게는 거무스름한 피부와 흐트러진 머리에 이륜차를 몰며, 거리마다 다양한 색상과 갖가지 얼굴의 가면을 파는 그를 보는 것이 낯설지 않다.

바이가면 아저씨는 베트남의 전통 가면극의 본고장인 빈딘(Bình Định)성 라오안(An Lão)현 안화(An Hòa)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렇기에 유년기부터 전통가면극이 있는 곳이라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디든지 찾아가 관람하곤 했다. 가면극을 보고 집에 늦게 돌아가면 아버지에게 혼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번 가면극을 보러가는 열정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어린 시절은 눈물이 반이었다. 가면극을 보러 갔다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했지만 나는 완고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면극은 너무 아름다웠고 나의 감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라고 말했다.

1992년 그는 대만의 미술품 생산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인물조각상 가게를 차렸다. 하지만 인물 조각상이 잘 팔리지 않자 가면으로 품목을 바꿨더니 뜻밖에도 20개 이상의 작품이 하루 이틀 만에 다 팔려나갔다. 그는 "그게 사람의 업보인거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가면극 무대 위의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었어. 군대에 입대하거나 호찌민시에 올라와 노동자로 일할 때 까지도 말이야. 가면극에 대한 애정이 나를 이 가면을 만들도록 일깨운 것이지." 라고 회상하였다.

가면을 제작하는 것도 쉬운 일 만은 아니다. 가면을 처음 제작할 때에 형틀을 만드는 재료를 찾거나 가면 초본을 위한 덩어리를 만드는 일 등, 그는 잇따른 시련에 부딪혔다. 그는 "형틀을 만드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 만약 형틀이 정확한 모양을 하지 않거나 비뚤어지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고, 가면의 심미적 가치에 매우 큰 영향을 준다." 고 말했다. 이후, 응웬반바이는 석고와 실리콘을 혼합하여 형틀을 만드는 방식과 석분과 폴리머를 적정비율로 혼합하여 가면의 원료로 사용하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가면초본을 위한 덩어리를 만든 후에 그는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골몰했다. 각각의 가면에 그는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고유의 색상을 사용하였다. 가면에는 충성심, 청렴, 선, 악 또는 희노애락 등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전문적인 회화기술을 교육받지 않았지만 그가 그린 얼굴들은 매우 다양하며 생동감이 넘치고 심미적 가치가 높다. 그는 "충신 인물은 웃음이 인자해야 하고 낯빛은 신성해야 한다." 고 설명했다. 그리고 간신은 배신을 할 때 낯빛이 언제나 두려움에 가득하고 입술은 오만해야 한다. 제일 쉬운 것은 광대의 얼굴이다. 볼, 입술 혹은 코 위에 "점" 몇 개만 찍어서 익살스러운 모습을 표현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포청천, 권공, 조조, 부처, 보살의 얼굴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 이외에도 그는 인디언, 고대 이집트, 아랍인을 표현한 가면을 만들기도 했다.


매일 아침 바이가면 아저씨는 한결같이 자전거를 끌고 호찌민의 익숙한 거리들 남끼코이이응이아(Nam Kỳ Khởi Nghĩa), 디엥비엥푸(Điện Biên Phủ) 그리고 쯔엉딘(Trương Định)거리들을 돌며 외국인, 미대생과 가면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 를 시작한다.

정오의 햇빛이 강렬하게 비출 때쯤 그는 "덜거덕" 이륜차를 끌고 집으로 향해, 이내 새로운 가면을 또 만든다. 그는 묵묵히 가면을 만들면서 베트남 고전 가면 예술을 유지하고 보전하고 있다.


[베트남통신사_또반(Đỗ Văn), 사진_응웬루언(Nguyễn Luân)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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