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해방’ 1700km를 가다
‘사이공 해방’ 1700km를 가다
  • 베한타임즈
  • 승인 2016.04.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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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30일’의 뿌리

베트남은 '바므이탕뜨' (4월30일)를 '남부해방일' 혹은 '남부전복일' 로 부른다. 베트남은 '4·30 항미전승' 에 앞서 1954년에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 원정군을 무조건 항복시켜 '5·7 항불전승' 을 이루었다. 베트남이 항불과 항미 전쟁을 차례로 치르며 통일을 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7년이다. 그래서 잡 장군은 "4·30 항불전승은 5·7 항불전승에서 움텄다" 라고 말했다.잡 장군이 쓴 회고록 <디엔비엔푸-역사와의 동반>(2004년)을 영문으로 번역한 사람은 미국 여류 작가 래디 보튼이다. 그녀는 '세계를 바꾼 결정' 이라고 제목을 단 기고문(베트남 타임스 2009년 4월25일자)에서 베트남군이 당초에 디엔비엔푸 총공격일을 1954년 1월 말로 잡았다가 왜 3월13일로 연기했는지, 여러 추적 조사 자료를 제시해서 밝히고 있다.

■ 수정 전략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

베트남군은 당초 '신속한 타격, 신속한 승리' 를 전략으로 짰다고 한다. 그런데 기습타격 예정일을 11일 남겨놓고 호찌민 대통령은 "승리를 확신할 때만 싸우라. 승리가 확실치 않으면 싸우지 말라" 고 명령한다. 잡 장군은 기습의 선봉대인 제308 '강철사단' 을 라오스 국경 쪽으로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장군의 새로운 전략은 '신속한 타격, 신속한 승리' 에서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 으로 바뀐다. 그리하여 3월13일 오후 5시를 기해 개시된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 의 디엔비엔푸 공략전은 55일간 밤낮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5월7일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나바르 장군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 분단 17°선에서

1972 년 봄 북군은 파리평화협상 타결을 앞두고 군사분계선인 17°선에서 춘계 총공세를 취했다. 당시 필자는 사이공 주재 특파원으로 첫 번째 근무를 하던 때였다. 나는 최전선으로 달려가기로 결심하고 홀로 사이공을 떠나서 1100km를 북상해 4월5일에 꽝찌에 도달했다.

인적이 완전히 끊긴 1번 국도를 따라 최전선인 동하 시내로 들어가던 길이다. 초토화한 동하 시, 내가 저 앞에 보이고 포성이 귀를 찢는데, 베트남 삿갓을 쓴 농부 한 사람이 길가의 논을 묵묵히 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농부는 최전선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논을 일구고 있었다. 그날 나는 최대 위기를 넘겼다. 남군 중위의 지프차에 편승해서 마침내 17°선의 동하강 앞 최일선에 진입해서 사진을 찍으려던 찰나, 매복했던 북군 게릴라의 B40 견착용 로켓포의 저격을 받았다. 위기일발, 포탄은 15m 전방에서 작렬하고 우리는 지프차로 줄행랑을 쳐서 꽝찌로 돌아갔다. 바로 이런 사연이 있는 베트남 분단선이다.

■ 카페 지브랄

우리가 투숙한 콘티넨탈 호텔은 호찌민 중심의 람손 광장 한쪽에 있는 프랑스 양식의 131년 된 최고(最古) 호텔이다. 그 건너편에 AP 통신사가 들어 있던 에덴 빌딩 건물이 있다. 에덴 빌딩 모퉁이에 람손 광장을 바라보는 카페 지브랄이 있다. 콘티넨탈 호텔과 카페 지브랄은 각각 식민지 시절과 전쟁 시절에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들의 집합소였다. 그 가운데 카페 지브랄이 문을 닫았다. 50년 된 에덴 빌딩이 호찌민 시 인민위원회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강제철거를 당했다. 그곳에 거주하던 200가구는 이주약정서에 서명하고 4월30일까지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에덴 빌딩에 있던 역사적인 카페 지브랄 얘기가 나왔다. 타이 부위원장은 개발업자가 에덴 빌딩을 현대적으로 건축하되 카페 지브랄만은 더 크지도 작지도 않게 복원하도록 지시했다고 말했다.거리와 건물마다 베트남 금성홍기와 "불멸의 전승일 4월30일과 5월1일 국제노동절 정신을 기린다" 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중심지 번화가인 동코이, 응우옌우에, 레로이 거리는 승리의 황금색 'V' 자로 장식한 네온사인이 휘황하게 명멸한다.

■ 전후 세대의 항변

지금 베트남은 4·30 항미전승과 5·7 항불전승의 기세를 저력으로 삼아 정경분리의 이름 아래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4월30일 열린 통일 베트남 경축행사는 혁명 2세대와 3세대가 주관하는 의례적 행사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의 전후 세대는 그런 혁명 세대와 다른 새로운 정치 문화 속에 성장하며 때로는 갈등 요소를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전후 세대는 혼란을 느끼고 반역하며 신자본주의 체제로 말미암아 통속화하고 있다. 근간에 호찌민 시에서는 <나의 귀신아내>라는 연극이 500회 이상 공연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희곡을 쓴 무명의 작가는 한 일간신문사 기자인 30대 초반의 쩐반홍이다. 극의 줄거리는 통속적인 반전을 담았다.작가 쩐반홍은 1975년 4월30일 이후에 태어나 역사적 투쟁담을 귀 따갑게 들으며 성장해왔으나 이제는 새로운 욕구, 다시 해석하고 싶은 욕구가 가슴에 가득하다고 고백한다. "이런 회의가 든다. 1975년 이전에 아버지 세대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그런데 그때의 영웅이 지금도 여전히 영웅이다. 이것은 진저리가 나고 싫증이 나는 일이다." 그는 이 사회에서 귀 막고 눈 막고 입 막고 살고, 과거의 가치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긴다.

안병찬(전 한국일보 베트남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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