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응우옌 잡 역사를 운반한 베트남 통일 전략가
보 응우옌 잡 역사를 운반한 베트남 통일 전략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3.10.20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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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언론인권센터명예이사장



해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를 찾을 때 근황이 가장 궁금한 인물은 108중앙군사병원에 입원해있던 독립혁명영웅인 보 응우옌 잡이었다. 그는 베트남의 공식 나이로 103살에 타계했다. 베트남은 어머니 뱃속에서 자란 10개월을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 일생에 포함시킨다.

공교롭게 보 응우옌 잡이 떠난 10월 4일은 나의 생일이었다. 나의 조부가 지압이 태어나가 한 해 전인 1910년에 경술국치를 통분하여 순절한 날짜도 10월 4일이 아니던가. 비록 우연한 일치이기는 하지만 10월 4일이라는 날짜에서 탄생과 소멸이 교차함을 느낀다.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보 응우옌 잡의 공식 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명 : 보 응우옌 잡

별명 : 안 반(큰오빠 반)

출생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꽝빈성

1911년 8월 25일 생(연령 103세)

충절한 나라 : 베트남

복무분과 : 베트남인민군대

복무기간 : 1944년-1991년

계급 : 4성 장군

사령부서 : 베트민(베트남독립연맹Ÿ월맹)

및 베트남인민군대

참가 전쟁 및 전투 : 제2차세계대전, 제1차인도차이나전쟁(1946-1954), 랑손전투(1950)Ÿ호아빈전투(1951-1952)Ÿ디엔비엔푸함락전(1954)

베트남전쟁(1960-1975),떼트총공세(1968)Ÿ부활절총공세(1972)Ÿ사이공함락전(호찌민전역Ÿ1975)

훈장 : 최고전승무공훈장 5개

정치경력 : 베트민 내무장관Ÿ베트남 국방장관Ÿ부총리Ÿ정치국원

오로지 호찌민을 보좌하여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 전쟁에 헌신한 그의 삶이 웅대한 만큼 그 죽음은 울림이 크고 깊다. 이때에 예상했던 대로 호찌민국가대학 박사 구수정이 페이스북에 글 한 편을 올렸다.

“나는 2005년에 베트남 종전 30돌 기념으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처음 질문을 던질 때는 "장군"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레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의 서거 소식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베트남의 한 세대가 떠났다! 어떤 말로도 나의 애도의 심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구수정이 디엔비엔푸 전투에 이어 세계 최강국 미국을 물리친 바로 그 ‘전설의 노장’을 단독으로 인터뷰한 때는 ‘장군 할아버지’가 95살이 된 해였다. 그녀는 한국 인쇄매체의 필자로는 최초로 노장을 심층 면담했는데 존경심을 품고 스킨십을 하듯이 묻고 답을 받은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한겨레21>, 2005년 5월 7일자 특집)그녀의 글 서두는 이렇다.

보응웬잡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에 후드득 몇 낱 비 꽃이 피었다. 봄비치고는 제법 방울이 굵다 싶더니 빗발이 금세 가랑비에서 날비로 바뀐다. 마음이 들썽거려 밤새 헛잠에 부대낀 나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장군을 만나면,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가 말았던가.

고등학교 역사교사 출신인 ‘장군 할아버지’는 구수정의 질문에 자기 역사관을 이렇게 피력한다.

“ 역사는 쉼 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야 ”

“짜우어이(얘야)!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아. 역사는 쉼 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은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잘못은 반복될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종국에는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될 거야. 그것이 역사의 묵연한 법칙이지….”

장군 할아버지는 호찌민이 준 금언이 ‘이공위상(以公爲上)’이라고 확인한다. 이 4자성어는 혁명을 하려면 나보다 우리를 섬겨야 한다는 뜻, 당을 알고, 인민을 먼저 위하고,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이 말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단지 인민과 평화를 위해 싸워온 군인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노장군은 말한다. “얘야, 할아버지 빰에 뽀뽀해주련.” 구수정은 장군의 앙상한 어깨를 끌어안고 그 볼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고 인터뷰 글의 말미에 썼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8년, 임홍재 베트남주재 한국대사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을 예방하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그해 6월 말 이틀간 일정으로 디엔비엔푸 전장을 둘러본 후 7월에 지압장군을 면담한 전말을 들려주었다.

“그의 접견실에 크게 걸려있는 마음 심(心)자는 역전의 노장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97세의 고령인 지압장군은 1954년 1월 1일 전쟁터로 떠나는 그에게 호치민 주석이 지시한 훈령과 디엔비엔푸 전투의 상황을 설명할 때는 눈빛이 빛났고 말투가 또렷하게 변했다. 한국과 베트남 간의 관계를 말할 때도 통계수치까지 소상히 언급하면서 좋게 평가하고 말미에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한국 거주 베트남인들에 대해 잘 도와줄 것을 당부하여 지도자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다.”

"4Ÿ30 항미전승은 5Ÿ7 전승에서 움텄지”

잡 장군을 말할 때는 주로 디엔비엔푸의 5Ÿ7 항불전쟁승리가 거론되지만 그는 1975년 사이공을 해방한 4Ÿ30 항미전쟁승리의 주역이기도 하다. 베트남은 ‘바므이탕뜨’ 곧 4월 30일을 ‘남부해방일’ 혹은‘남부전복일’로 부른다.

당시 그는 최 일선의 최고사령관이 아니고 국방장관으로서 통일 결정전인 이른바 ‘호찌민 전역’을 총지휘했다.

보 응우옌 잡은 사이공을 미토지역과 수안록 지역 양방향에서 사이공을 최후로 공략할 때 레 둑 안과 쩐 번 쩌 두 장군을 기용했다. 그리하여 1975년 4월 9일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의 목 줄기를 노려 1번 공로상의 롱칸성도 수안록을 포위 공격했다. 당시 나는 한국일보 기동특파원으로 사이공에 남아 최후의 나날을 취재하면서 사이공 정권의 레 민 다오 장군이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수안록을 외국특파원들과 종군한바 있다. 수안록이 함락된 것은 4월 21일이었다.

1975년 4월 30일 아침, 사이공 독립궁에 진입하여 즈엉 반 민 대통령의 항복을 받은 것은 보 응우옌 잡의 지침을 받은 레 쫑 탄 장군의 선발대였다. 훗날 잡 장군은 “4Ÿ30 항미전쟁승리는 5Ÿ7 항불전쟁승리에서 움텄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베트남 기록은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상대하여 이긴 적장으로 프랑스 사령관인 필립 레크레르크Ÿ로알 살랑Ÿ알리 나바르 등 7명, 미국 사령관인 웨스트모어랜드Ÿ애브럼스Ÿ웨이언드 등 3명을 꼽는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프롤레타리아와 자본계급의 군사 독트린을 두루 섭렵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중에는 소비에트의 항독전쟁과 중국의 항일전쟁, 클라우비츠의 전쟁이론과 나폴레온의 전략이 포함된다. 그 자신은 사실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결정전’ 의 군사이론을 개발하여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일생에 가장 어려웠던 결정을 내린 것은 디엔비엔푸 포위 기습공격을 앞둔 1954년 1월 26일로 꼽았다. 그는 ‘신속한 타격, 신속한 승리’ 의 전략을 철회하고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의 수정전략을 채택한다.

그리하여 한 발 물러서서 3개월을 기다렸다가 3월 13일 오후 5사를 기해 ‘확고한 공격, 확고한 전진’ 의 디엔비엔푸 총공격을 전개하여 55일 만인 5월 7일 프랑스 원정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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