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2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2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2.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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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상일주사(天江上一柱寺): 베트남 불교사


베트남에 불교가 소개되는 배경

인도지나 반도에 위치한 베트남은 인도와 중국이라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문명을 가진 두개의 거대한 나라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베트남과 인도는 육로와 바닷길에 의하여 아주 일찍이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인도의 국제무역 상인들은 아랍과 중동의 여러 나라와 상품의 교역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과도 교역을 하였다. 그들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지나 말라카해협을 지나 베트남 동해를 통하여 베트남, 중국, 일본에 도달하였다. 오는 길에는 남서 몬순의 계절풍을 이용하고 가는 길에는 북서 몬순(monsoon)을 이용하였다. 항해는 일 년이 걸렸는데 이 수입과 수출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는 과정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지역의 현지인들에게 문화와 생활관습과 종교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그들은 현지인들의 문화, 종교 및 상업적 팽창주의 형태적으로 인도인화 하는데 참여 하였다. 일부 인도와 동양의 여러 나라들을 왕래하는 무역업자들은 이들 나라를 왕래하면서 토착민 여인들과 결혼하고 그 지역정부에 고용되어 귀빈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남지나해의 섬들 도처에 인도인 가족과 도로와 마을이 상주하였음을 말하여주는 것이다. 이들 인도인들은 인도관습과 예술과 종교(힌두교와 불교)를 그들이 정착하는 나라에 이식(移植)하고 그들의 종교적인 마음을 기둥이나 벽 등에 산스크리트어로 새겼다.

기원전 1세기 직전과 특히 기원후 2-3세기에 이러한 모든 인도인 항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힌두 이데올로기가 불교의 인류평등주의 이상에 의하여 그 근간(根幹)이 흔들리는 원인이 되었으며, 주로 이러한 마하야나 종파는 기원 초기에 꽃이 만개(滿開)하였다.

마하야나는 계급과 모든 인류의 동일성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해탈과 성취조차도 희생하면서 중생(살타:Sattvas)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희생을 구현하는 보리살타의 이상을 역설하였다. 보리살타는 언어, 관습 및 생활습성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이나 그에 따른 위험이나 아픔에 대한 두려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히 국가와 민족의 간격 없이 인간 해탈의 이상적인 목적을 위하여 매진하였다. 이것은 말하자면 불교이념이 인도인들(무역업자들을 포함한)을 해방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 세계로 나아가게 한 것이다. 마하야나는 또한 부처와 보리살타를 진실 되게 믿는 자를 보호하고 그들 신도들에게 항상 임재함을 확신 시켜주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상인들과 선원들은 자주 보디사트바 아바로기테스바라와 부다 디판카라의 구원을 기원하였다.

에이 포우처는 그의 작품에서 디판카라(디바)가 항해자를 수호하는 부처임을 입증하였다. 인도인 선원과 상인들은 그들의 항해 중에 그들의 일상의 기원을 들어주는 디판카라의 상을 그들의 배에 모시고 다녔다. 아바로키테스바라는 모든 극동의 여러 나라들에 천개의 눈과 천개의 팔을 가진 보리살타(천수천안보살)로 알려졌는데 그는 담대한 용기와 엄청난 신력을 지니고 있어 그를 돈독하게 믿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면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게 하여 준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도상인들과 선원들은 디판카라와 아바로기테스바라의 상(像)을 모시고 다니고 그들이 일상으로 이러한 부처를 부르며 기도하는 것이 그들이 기착하는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인도인들의 평화적인 동진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선도하였다고 본다. 역사적인 동서의 만남은 이러한 확장의 하나 또는 기초적인 이유를 제공하였다. 불교 성직자들은 선원들과 무역상들을 따라 불교 교리를 전도하려고 나섰다. 동시에 불교 성직자들은 대부분이 배운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이 없이 불교나 힌두교나 산스크리트 문학은 크메르, 참파, 인도지나, 말레이시아문명에 그렇게 각인되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의 확장은 한편으로는 육로와 강과 도로를 따라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인도 무역상들은 말라카해협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도는 대신에 말레이사아반도를 단 몇 시간에 도로로 가로질러 쉽게 두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그들은 중앙인도를 출발하여 도로와 배로 세 개의 절을 지나 칸부리강을 타고 내려가서 차오프라야 삼각주에 도달하였다. 다른 도로는 문(Mun)계곡과 시텝과 코삿고원을 가로질러 짜오프라야와 메콩을 연결하였다. 이 루트는 바삭과 메콩분지, 캄푸챠영토인데 기원전에 인도인 이주민에 의하여 만들어진 제국이었다. 1세기에 인도인 불교 성직자들이 이 루트를 따라 라오스에 도달하고 다시 쯩선산맥을 횡단하는 여행을 하여 베트남의 탄화와 응에안에 도착한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직도 북로는 아쌈, 미얀마, 운남을 통한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루트이다.

위에 언급한 모든 역사적이고 지리학적인 증거들은 불교가 처음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하고 그다음에 베트남에 전파되었다는 이론이 틀렸음을 말해 준다. 먼 과거에 남중국에 불교가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베트남은 믿음을 전도하기 위한 인도인 성직자들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 인도인 성직자들이 베트남에 처음으로 들어왔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이 문제에 대한 확정적인 역사적 자료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아쇼카제왕 치세 기간인 기원전 300년 이전은 알 수가 없고 불전의 3차결집 이후 불교 전도사들이 유럽, 동방, 동남아시아 등의 해외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우타라와 소나가 인솔한 이 전도사들의 일단이 황금의 나라 수바나부미에 보내졌다. 미얀마 불교의 역사는 이 두 종교인이 그들의 믿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태국의 불교역사는 같은 문제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다.

이 두 성직자들이 더 나아가 베트남에 왔을까? 이 문제는 베트남과 중국의 역사가들 사이에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교지(오늘날의 하이퐁 도성)의 네레 성채에 한 개의 아쇼카탑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국왕조의 행정 기록에 주요하게 그리고 있다. 마하야나 프라즈나의 1차 불전(佛典)이 남부인도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베트남에 아주 잘 알려진 금강경(金剛:바즈라)은 아주 중요한 프라즈나(大乘)경 중의 하나이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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