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3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3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0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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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불교의 대중화

 

불교는 이제 더 이상 민족종교가 아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 생동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레(黎)왕조(1428~1788)이래 왕실은 더 이상 절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왕과 왕후도 더 이상 절 건축에 돈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수도인 탕롱 절은 민중들의 덕택으로 그들의 종교행사를 계속 할 수가 있었다. 지방에도 사정은 같았는데 전답, 시장이나 부락의 목적을 위해 들어오는 돈으로 충당하였다. 동시에 귀족과 고관들은 절의 보수와 종이나 불상의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기부하였는데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유교이념과 충돌한다고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교리적인 관념으로 종교인들을 나아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특별한 개념이 민중들 사이에 있었다.

이러한 관념에 따라 불교는 민중의 가슴속에 내재한 전통적인 기본에 일치하는 일상적인 습관이 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학자들이나 승려들에 의하여 쓰여진 문학 작품을 통하여 민중들의 입으로 대대손손 전하여 졌음이 분명하다. 실제적으로 그들은 민중 속에 살아 있었고 그들의 작품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이성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었다. 민중의 감정적 도덕적 욕구에 부응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널리 읽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런 전형적인 것이 아직 그 저작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운문소설인 관음시경(觀音氏經)과 남해관음(南海觀音)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사본은 다만 인쇄된 날짜만 전해지고 있다. (19세기 이전) 이 이야기는 레(黎)왕조 시대의 민중의 불교에 대한 개념을 알려 준다. 

 

관음씨경(觀音氏經)

관음씨경은 베트남 이두문자인 놈(nom)문자로 쓰여진 연극의 대본이다. 극중에 많은 부분이 승려의 한(行:승려의 노래)과 게(偈)와 같은 노래이다. 이 소설은 유교와 불교 모두의 지식을 가진 학자에 의하여 쓰여 지고 연극은 소작농들에 의하여 창작되어 무대에 올려 진 것으로 보인다. 소설 속에 관음시경의 내용은 보다 복잡하고 서민적이지 아니하다. 연극이소설보다 몇 세기 앞서 창작되고 그 다음에소설이 나타났고 그것은 문학적인 관점에서 연극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연극과 소설의 내용은 동일하다.씨경(氏經)은 경심(經心)의 불명(佛名)으로 관음(觀音)의 화신이다. 그는 젊은이로서 이전 세상의 업보로 인해 승려가 되었다. 그는 부처의 나라에 도달하기 전에 망(茫)씨 가문의 딸로 환생하였다. 씨경이라는 이름의 이 아가씨는 매우 아름답고, 덕성스럽고, 재능이 있었다. 나이가 차서 숭(崇)씨 가문의 젊은이인 선사(善士:善男)와 혼인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학업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그들 가족을 성심으로 돌보았다.

어느 날 밤 공부에 지친 선사가 그의 침대에서 깊은 잠이 들었는데 그의 젊은 아내는 그의 곁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홀연히 남편의 얼굴에 머리카락이 잘못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을 칼로 잘라 내려고 하는 순간에 선사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기 아내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하였다. 젊은 아내의 결백 주장은 무위로 돌아갔다.

선사의 집에서 쫓겨난 뒤 그녀는 남자로 변장하고 경심(經心)이란 이름으로 운사(雲寺)의 젊은 승려로 입문하게 되었다. 마을의 부자집 딸인 씨묘(氏妙)가 젊은 승려인 경심을 성불하지 못하도록 유혹하였지만, 이루어 지지 않자 짝사랑에 대한 보복으로 농장의 일꾼과 하루 밤을 보낸다. 이로 인해 임신하게 되었고 마을의 비난을 모두 경심의 잘못으로 돌렸다. 젊은 승려는 그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였으나 허사가 되었다.

절의 주지스님은 그녀의 자유를 구속하는 벌을 내리고 그 시각 이후로 절의 대문아래서 생활하도록 하였다. 씨묘는 아들을 낳아 절에 있는 경심에게 맡겼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경심을 더욱 곤경 스럽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젖을 빌어 먹였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도 전에 그녀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그녀의 양친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녀가 죽은 다음에 주지스님에게 아이를 맡겨달라고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은 다음 사람들은 마침내 그 젊은 승려가 젊은 여인임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부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념일에 천존 부처가 나타나서 경심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 결정문을 읽게 된다. 연극에서 운사(雲寺)의 주지는 게(偈)를 노래한다. “이제 경심은 행복하네, 그녀는 한없는 가장 강력한 창조물이 되었다네,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나기 전에 이루어진 모든 것과그녀는 그녀의 양친을 위하여, 그녀의 남편을 위하여, 그녀의 아이를 위하여, 니르바 나(涅槃)의 문을 열었다네.”

승려는 불교를 통하여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도우며, 인류애와 종교적인 경건심을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불교가 유교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하는 것이다. 운문체의 소설은 이것을 아주 길게 묘사하고 있다. 경심의 무구( 無垢)를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씨묘氏妙)로 하여금 가련한 여인을 애도하게 만들고 그녀의 모든 장례비용을 부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심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문학적인 가치만으로서도 관음시경에 대한 운문의 소설은 베트남 문학사에서 가치 있는 자리를 점하고 있다.

 

남해 관음

대중소설 남해관음은 원 제국시대(1260~ 1368)의 중국 승려에 의하여 저작되었다. 그것은 베트남에 약 14-15세기에 소개되었는데 관음시경이전에 많이 유포되었다. 놈 문자로 쓰여진 초판의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어(國語:오늘날의 베트남 문자체)로 된 최초의 텍스트는 휀틴꾸어(黃靜財:1834-1907)에 의하여 1897년 관음연가(觀音演歌)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경전으로서 남해관음 이야기는 전적으로 베트남화 하였다. 흥림족(興林族:?)의 묘장(妙裝王:수바뷰하)의 세째 딸은 향적사 (香寂寺:베트남에 있는 절)에서 불교를 배우고 그곳에서 부처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관음씨경과 마찬가지로 소설 남해관음도 불자(불교도)를 설교하는 형식으로 그는 항상 부모에 대한 공경의 의무를 성취하고 동시에 타인을 위한 자비를 실천한다. 두 소설은 유교의 공격으로부터 불교를 옹호하는 성격도 띠고 있다.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위신력 있는 부처의 가르침을 권하노라. 마음으로 부모를 효성스럽게 공경하고 머리에 보시의 감정을 품는 사람. 그 부모를 도우고 봉양하는 효성스럽게 공경하는 사람. 보시는 불행을 벗어나고 그들의 삶을 보호하여주는 수단이다. 천개의 눈과 천개의 귀를 가지고 도움을 주네,부처는 같은 정신으로 모두를 감싸주네,우리 베트남 바다에 모든 사람들이 보리 사트바 관음을 안다네.”남해관음(南海觀音)으로 불려진 그녀의 원래 이름은 묘선(妙善)이다. 묘선(妙善)과 자매인 묘음(妙音)은 모두 흥림의 수바뷰하왕의 자손이다.

그들의 전생은 시(施) 집안의 아들이었다. 관음씨경과 남해관음 두 소설의 공통점은 그녀들의 전생이 모두 젊은 남자였다는 점이다. 불교경전 보문법화경(普門法華經)에서는 불교 교화를 위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하여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처가 되는 길에 성 정체성의 무의미성을 말하려는 의도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좋은 마음씨의 사람이 나타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또는 그녀가 관음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관세음(觀世音:아바로기떼스바라)은 “누구든지 인생의 비통함을 그의 귀에 들리도록 하기 만 하면”그 비탄에 빠진 사람을 지원하여 주기 위하여 나타나서 도와준다고 믿었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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