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3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3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2.2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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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상일주사(天江上一柱寺):베트남 불교사
기원 후 3세기까지의 불교사


베트남에 아주 잘 알려진 금강경(金剛:바즈라)의 근간(根幹)이 되는 나가르주나(용수:龍樹:A.D2세기)는 베트남과 중국 두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명한 중론(中論:마디야미카까스트라)을 지었다. 베트남 최초의 불경의 분석은 두 갈래의 승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띠니다르우찌(비니타루찌)와 무언통은 마하야나 프라즈나(大乘)본연의 심원한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보였다. 이리하여 마침내 마아야나 프라쥬나는 남인도로부터 인도네시아와 참파를 거쳐 베트남에 전래된 것이다.

중국에는 최초의 프라즈나 원전이 한나라(A.D2세기)때 번역되었지만 그 영향은 지대하고 영원한 것이었다. 5세기 초, 중국에 쿠마라지바(童壽)가 도착한 이후 프라즈나원전은 엄청난 수량으로 출판되었다(K.Mukerjo의 중국과 극동의 인도문학). 교주(郊州:오늘날의 베트남)에서는 3세기 초에 불교에 대하여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프라즈나문학의 가장 오랜 고전으로 여겨지는 책의 하나인 아스타사하스리카가 강승회(康僧會)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다마사하스리카는 한 대(漢代)말에 로카세마에 의하여 번역되었는데 한참 후인 예컨대 프라즈마문학의 제2기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3세기 초에는 강승회는 이미 프라즈나문학의 고전으로 되어 중국이 아닌 남인도에서 직접 인도인 성직자들에 의하여 교주에 소개 되었는데 이는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번역된 것이었다. 이것은 루이라우의 불교 센타를 있게 하였고 책들 중의 일부는 아스타사하스리카의 확립이 된 불교신자를 가르치는 책으로 교주에서 중국어로 번역 되었다.

불교는 수세기의 시기 동안 베트남에 소개된 것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이 영예는 먼저 인도인과 중앙아시아인 그리고 중국인과 베트남인으로서 인도와 중국에 가서 불교를 깊이 연구한 사람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일부 중국 승려들은 인도로 가는 길에 동해의 항구에서 출항하기 전에 교주에 머물렀다. 4세기 초에는 무팝란(武法蘭),무다오투이(武道秀), 6세기 말에 민빙(明遠), 5세기와 7세기에 후에망(彗芒), 보한(無限), 담뉴언(曇崙), 찌황(智恍), 호이닌(會寧), 잉아띤(義靜)을 포함하는 사람들이다.

베트남 승려들은 인도로 가는 방향에 남서해양에서 중국의 불교신도들과 일행이 되었다. 또 다른 일단은 단신으로 인도상선을 탔는데 쿠이쑹(휴충: 虧沖), 후에딤(혜염:慧焰), 찌한(지행:知行), 다이탕당(대승등:大乘燈)선사 같은 분이다. 이들은 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많은 불교국을 경유하였다. 인도본토에 도착한 베트남 승려들은 서부, 중부, 북부 인도를 두루 여행하였다.

베트남에 불교전래는 중국의 지배가 시작되는 시대부터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는 시기까지 계속된다. 이에따라 자연스럽게 전래 루트가 북쪽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다양한 종파들이 줄줄이 베트남으로 들어오고 베트남 사회에서 인도 불교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신앙의 방법 등에서 중국의 일반사회의 특징이 많아졌다. 동시에 힌두이즘과 이슬람의 맹습(猛襲)으로 말미암아 이 시대에 인도불교가 쇠퇴하였다.

불교는 베트남의 발전에 따라 각 시대별로 독특한 형태를 이루었다. 기원 후 초기 몇 세기 한제국(漢帝國)시대에 세 개의 대형 불교 센터가 있었다. 낙양, 팽성, 그리고 루이라우가 그것이다. 오늘날의 후난성에 있는 황하의 남쪽 락강의 강둑에 건설된 낙양은 동한의 수도였다. 서기 165년 한제국의 환제는 한 장소에서 노자와 석가모니의 사당을 운영하게 하였다. 불경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승려와 협력하여 중국의 승려에 의하여 산스크리트에서 한자로 번역 되었다. 그들 중에는 두 명의 이란인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안세고와 안현이었다. 낙양에는 두 개의 큰 가람(파고다)가 있었는데 백마사(白馬寺와) 허창사(許昌寺)였다.

서기 50년 양쯔강(중국의 장사지방) 낮은 유역에 자리한 팽성(彭城)의 귀족들은 불교와 도교를 함께 숭상하는 사람들이었다. 중국 서한(西漢)의 왕자 유영(劉瀛)은 한왕조의 광무제(光武帝)의 아들이다. 그는 팽성에 이주하여 황로(黃老:노란모자를 쓴 불교의 부파)를 만들었다. 그는 매일 참회와 회개기도를 행하고 육식을 금하여 채식만 하였다.

서기 65년 팽성의 불교 교단은 외국인 승려와 중국의 석학들이 은둔자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공존(共存)하였다. 루이라우는 교지(郊址)의 주도인데 오늘날의 박닌(北寧)지방인 홍하 델타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은 팽성과 낙양을 잇는 도로로 서로 연결되었다. 중국의 역사에는 이곳에 대하여 약간만 언급하고 있는데 그 것은 루이라우가 아직 원경(遠境) 벽지(僻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세기에 불교에 대한 한(漢)대 최초의 책의 하나인 ‘이혹론(理惑論:진리와 미망의 형이상학)’이 모자(眸子)에 의하여 씌어졌다. 이것은 루이라우 사람인 모자(眸子)와 강승회(姜僧會)같은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의식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 많은 문서들은 우리들에게 기원후 1세기에 루이라우의 불교의 상황에 대한 적지 않은 시사를 주고 있다. 다음은 ‘영남적괴(嶺南摘怪:영남의 기이한 이야기)’란 제목의 이야기 모음집에 전하는 저동자(渚童子)에 대한 이야기다.

‘동자(童子)와 그의 부인 선용(仙蓉)은 저자거리를 만들고 외국인과 상거래를 하였다. 어느 날 동자는 외국인 상인과 함께 그의 섬을 떠났다. 그들이 탄 배가 식수를 얻기 위하여 산기슭의 땅에 정박하였다. 동자는 경원(琼園)이란 산에서 인도인 승려를 만났다. 그의 암자는 산기슭에 지어져 있었는데 동자에게 불교교리를 가르쳤다. 동자가 그의 스승에게 모든 것을 전수받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인도인 승려는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와 지팡이를 주면서 주문을 불어 넣어주었다. 동자가 그의 고향으로 돌아오자 그의 부인에게 불교교리를 전도하였다. 그 후 두 부부는 그들의 사업을 버리고 믿음의 진수를 얻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인도인 승려는 초인적인 힘을 가졌고 동자와 선용부부는 그들의 장사를 그만두고 깨달음의 진수를 찾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이같은 이야기는 베트남 민중에게 어떻게 불교가 자리 잡았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오지(吳誌)라는 책에는 A.D.207년 교주의 중국 관리로서 20년 동안 그 지방의 평화를 가져온 행정관 준욱(俊旭)에게 원휘(垣輝)가 보낸 편지에 사섭(士攝)을 찬양하는 문구가 나온다. ‘그가 요새를 들어가고 나올 때는 피리와 퉁소, 징과 꽹과리 소리를 장엄하게 울려 환영하였다. 그가 갈 때는 훌륭한 기병들에 의하여 호위를 받았고 그의 마차는 손에 타는 선향(線香)을 든 수 십 명의 호(胡)로 둘러싸였다. 호(胡)란 실은 당대에 이미 교주에 여럿이 있던 인도인 승려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신자 사섭(士攝)은 이들 승려와 함께 그의 여행의 동반자 관계였다.

A.D. 2세기 말에 씌어 진 모자(眸子)의 ‘이혹론’란 책에 따르면 교주에는 외국인 승려를 포함한 다수의 승려들이 벌써 있었다고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 중의 일부가 타락한 원인이 되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타났다. ‘승려 중에는 술을 마시고, 부인을 두고, 돈과 보석을 축재하고 다른 사람을 기만하기를 다반사로 하였다.’ 이것은 불교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존재하여 오면서 세속화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교주의 최초의 포교사가 된 강승회(200-247A.D.) 승려는 중국의 장동으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가기 전에 교주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저서 안본수의(安本受意)에서 ‘나는 나의 가족의 막내로 태어나서 나 자신이 땔감을 하러 갈 때 쯤에 벌써 나의 부모는 세상을 떠났다. 나의 종교인생의 수계를 주었던 세분의 선사도 또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을 우러러 나는 깊은 슬픔과 송구함을 느낀다. 나를 가르쳐 준 사람들이 보고 싶다.’라고 쓰고 있다.

중국에서 3세기 이후 계속하여 화상(和尙:우파디야하), 알마(謁魔:카르 마다나), 교수(敎授:아카르야)와 같은 3명의 선사가 수계선사로 그 직분을 수행하였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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