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4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4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3.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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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상일주사 : 베트남불교사
베트남에 빠른 불교 전파의 배경
11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씌어진 불자의 교과서 인 ‘선원집영 어록(禪苑集影語錄:禪門選集)’은 루이라우에서의 초기 불교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씨왕조의 왕후 어머니 영임(瑛姙:綺蘭)이 어느 날 지공(智空)선사에게 어떻게 언제 불교가 베트남에 소개 되었는지를 묻고 있다. 지공은 다음과 같이 중국의 선사 담천(曇天)과 중국의 황제 수문(隨文帝)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교주는 인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요람(搖籃)이며 교통로에 있습니다. 중국에 전래는 교주의 루이라우에 스무 개의 탑이 세워지기 전에 장동에는 불교가 아직 상륙하지 않았고 15개의 불교 교리서를 번역하기 위하여 500명의 승려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지방에서 우리보다 먼저 불교를 알게 되었습니다. 작금에는 마하기역 (摩何記域:마하지바카), 강승회(姜僧會), 지강량(知剛量), 마우박(猫白)과 다른 승려들이 그곳에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루이라우의 불교센타 건립은 서기 2세기로 돌아가서 인도의 마하야나 이데올로기 운동에 그 기원을 둔다. 그 중의 하나는 매우 자유를 겸비한 역동적이고 열성적이되 독단적이지 아닌 성격을 띠고 포교에 있어 희생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마하야나의 출현에 대하여 말하자면 불교가 도약하기 시작하여 인도의 변경을 가로질러 베트남을 비롯한 산간벽지(山間僻地)로 퍼져나갔음을 의미한다. 마하야나의 전파는 크게 두 갈래의 성격으로 단정 지을 수 있다. 그 하나는 군대의 개입이 없는 중국의 대한(大漢帝國)이나 이슬람 국가의 경우처럼 평화적인 전파이다. 기원 이후 인도화한 왕국들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참파등의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이것은 사실상 그들의 궁전에서 많은 인도인 고문, 전문가, 불교 성직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인도의 중심부로부터의 독립을 말한다. 또한 인도의 두 가지 문화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계급 구분과 인종적인 편견(브라만은 아리안이 아닌자를 모두 ‘네그로’라는 딱지를 붙였다)을 가진 브라만 문화와 민족이나 종교, 계급의 구분 없이 평등을 지향한 불교문화가 깊숙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불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그 지방의 민중과 국가의 정치, 역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활방식이나 관습에 쉽게 수용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진보적인 특징은 B.C. 2세기의 마하야나 이데올로기 운동에 의하여 강화되었다. 마하야나의 이데올로기 상징인 프라즈나 문학은 중인도에서 처음 발생하였는데 육로를 통하여 북인도에 도달하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그리고 해로를 통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시안 국가에 전해졌다.

이와 같이 기원 초기에는 루이라우가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불교가 오래전부터 대중화되고 번성하고 있었다. 루이라우의 야우(뽕나무:오디:桑)는 한어(漢語)로 로이라우라고 발음되었는데 고라(古螺)와 롱변(龍編:현재의 하노이의 옛 이름)과 함께 베트남의 삼대 중심지였다. 등강의 북쪽 야우 언덕에 위치한 루이라우는 뽕나무가 자라고 삼림육성의 시험단지 및 명주 직물 및 기타 직물의 산지였다. 많은 중요 통신 루우트와 지방 사이를 수로에 의하여 십자로 연결되었는데 파라이(頗來), 동찌우(東朝)와 광닌(廣寧)으로 가는 길을 포함한다. 중국계 베트남인 선구자들은 가는 길(오늘날의 18번도로)과 강의 루우트는 야우(桑)와 등(嶝)과 홍강(紅江)과 룩다우(陸頭)타이번강(太平江)과 바다와 연결된다. 이러한 용이한 위치가 루이라우를 빠르게 경제중심지로 변모하게 하였다.

루이라우는 수세기에 걸쳐 북부의 통치기관이 자리한 정치중심지 이기도 하였다. A.D.179년 한 제국 통치시기에 교지(郊址)의 주도로서 그 역할을 한 교대(郊大)가 건축되었다. 건무(建武)16년 봄 교지의 원주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루이라우를 공격하여 한 제국의 관리를 압박하고 소정(蘇靖)은 도망하였다.

폭동이 가라앉은 뒤 한 제국은 옛터에 성읍을 복원하였다. 새로운 민중의 폭동에 직면한 한 제국의 새 관리인 주창(朱昌)은 142-143연간 교지의 주읍을 루이라우에서 롱빈(龍邊)으로 옮겼다. 그러나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아 루이라우에 다시 넘어갔다.

한제국의 정부관리로 임명된 시닙(仕攝)은 이 지역에 독립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남월(南越)이라 칭하였다. 그는 루이라우를 강화시켜 대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안전 요새를 구축하였다. 시닙(仕攝:사협)은 자신이 죽기 전에 그의 포부를 못 이루고 그의 아들인 시위(仕輝)가 계승하였다. 그럴 즈음 한제국이 멸망하였다. 오(吳)나라는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권력을 잡은 다음 루다이(呂大)를 교주 관리에 임명하였다. 루우다이가 교주에 부임하자 시위(仕輝)를 죽이고 시가를 중심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루이라우는 단지 수도로서 존속 시켰다.

당(唐)대에 시민들이 교주의 새로운 중심가를 똥빈(宋平)에 건설하였으나 일 년 후에 루이라우의 진가를 인정하고 다시 중심가를 루이라우로 돌렸다. 이 기간 동안 교주의 인구는 획기적으로 늘어나서 정부 관리인 리다이렁(李大梁)은 지방의 중심가를 다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쩐웽(鄭阮:705-805)대에는 거주민들이 다시 로이라우로 돌아왔다. 하루는 성곽의 옆을 걷고 있던 새로 부임한 관리인 리웽히(李元熙)는 성곽앞의 개울이 거꾸로 흐르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이 나쁜 징조에 대하여 두려워한 그는 그의 군대를 소집하여 루이라우를 떠났다. 대월사(大越史)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824년 11월 겨울에 이원희(李元熙)는 성곽 앞의 개울이 갑자기 거꾸로 흐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방민의 반란을 두려워한 그는 지방의 중심가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송평(宋平)(오늘날의 하노이).”

베트남에서 바다에 인접한 강물이 조수간만의 차로 역류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항상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개울물만 보아왔던 산간지대에 살던 사람은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바닷물이 밀물일 때 강물이 빠른 속도로 역류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 하였을 것이다.

교지의 중심지 루이라우는 수세기 동안 불교의 발전과 전파를 위하여 편의를 제공하였다. 관리들인 북부의 사람들은 황라오(黃老:불교의 한파로 누런 모자를 쓴)나, 공자의 세계관을 가지고 북쪽생활양식과 패권주의 관념 및 인종차별주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야만적이라고 여기고 적대하는 병합된 나라의 종교를 좋아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자의 가르침 보다 우월한 불교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황라오의 인간의 고뇌를 설명하여주고 그것을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고 보다 나은 세계를 성취하게 하여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들이 점차 생각을 바꾸도록 압박하고 불교의식을 하나씩 하나씩 깨닫는 자세를 가지게 하였다. 인도의 승려들이 절을 짓는 것과 선교하는 것을 허용하고 심지어는 그들을 초청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청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게 하여주기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지방 관리들과 지방민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에게 오직 불교만을 신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루이라우는 정치, 경제 중심에서 문화 중심지로 탈바꿈하여갔다. 지식층의 중국인들은 자국의 동란을 피하여 루이라우에 도착하면 그곳의 평화로운 환경에 매료되었다. 모두 지식인인 인도, 중앙아시아, 자바의 상인들은 그들이 그곳에 왔을 때는 다만 상품뿐만 아니라 지식과 생활양식과 풍습과 종교도 가지고 왔던 것이다. 루이라우의 불교는 석가모니의 불교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인도의 것과도 달랐다. 황노(黃老)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황노의 개념과 설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 부분에 있어 불교와 도교의 어떤부문에서 같은 점이 있었다. 원황(垣晃)은 그의 저서 후한기(後漢記:후한의 연대기)에서 “불탑은 불교도의 것이다. 중국의 서쪽의 다른 나라와 인도에서 불교는 번성하였다. 중국에 있어서 불교는 지식을 의미하였다. 이 종교는 인간을 선으로 인도하고, 사람이 생물(生物)을 죽이지 아니하고, 절제(節制)와 순결(純潔)로서 살 것을 권면하였다. 그 정수(精髓)는 사문(沙門)이라 불렀는데 한어(漢語)로 절멸(絶滅)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모든 욕망의 사멸(死滅),욕망을 무위(無爲)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善)’, ‘불살생(不殺生)’은 불교도이고 ‘모든 욕망의 사멸’, ‘무위(無爲)’는 불교도와 도교도의 공통점이다. 더구나 석가모니를 신(神)으로 여기고 그의 마법을 가진 힘을 전하여 주는 것으로 여겼다. 루이라우의 불교는 일반 농군의 신앙의 일부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부처가 범현세적인 신이므로 ,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선을 도우고 악을 벌주는 것이다. 이것은 베트남의 신데렐라 스토리의 옛날 이야기의 일종인 땀깜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부처는 하나의 신과 같은 슈퍼 파워를 지닌다. 자연현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이러한 현상은 귀신이나 다른 초능력을 변화 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만능(蠻嫏)이야기의 행복을 가져오고 불행을 제거하는 사법석(四法石:네가지 힘)이나 저동자 이야기의 나뭇잎으로 만든 모자나 지팡이와 같은 힘을 가진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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