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5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5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3.1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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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불교 초기 대표 지도자들


커우다라(具多羅)와 만능(蠻嫏)

커우다라의 행적과 이름은 여러 가지 베트남의 역사적인 문헌과 이야기 속에 전하고 있다. 커우다라와 만능에 대하여 다룬 많은 문헌들은 그 내용에서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로부터 우리는 전설의 이면에 숨어있는 역사적인 의미를 유추 해 낼 수가 있다.

‘보극(報極)이야기’에 따르면 “커우다라와 마하기역이 시닙(士峽)의 수도 루이라우에 도착하였을 때 불교에 대하여 정통한 수정(修定)을 만났다고 한다. 이후에 그들이 그곳에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커우다라만이 그 제의에 응하였다. 커우다라는 수정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때로는 여러 날을 연속하여 금식(禁食)하면서 금욕주의를 가르쳤다.

수정은 아만 이라 부르는 여아를(女兒) 커우다라의 시중을 들도록 명하였다. 한 달 뒤에 떠나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수정이 묻자 답하기를 ‘벼를 키질하는 키가 가득하여 나는 밤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의 갈 길을 잃었다. 수천만의 두려움으로 고통을 느끼고 나는 범인과 같은 지혜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바보스럽게 되어가고 있다. 그대는 나의 방법에 매달리고 나의 과거를 사랑하고 있다’.

커우라우는 그 곳에 좀 더 머물 것을 허락하였다. 때때로 그는 한 발로 서서 7주야를 꼬박서서 기도 하였다. 어느 날 가타(gatha:偈頌)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 집의 서쪽 산의 꼭대기로부터 그의 음성의 메아리만 들릴 뿐이었다. 깊은 수림으로 가려져 아만은 그를 뒤좇아 가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종적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산정의 커다란 나무의 몸통에 씌어있는 몇 구의 게송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승려가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어디론가 갔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자(眸子)와 이혹론(理惑論:진리와 미망의 형이상학)

모자는 본명이 모박(眸北)이었는데 그는 순수 한족(漢族)이었다. 약 A.D.165-170년에 양광(兩廣: 中國의 두 廣)에 있는 상오(湘吳)에서 태어났다. 그는 도교신자였는데 교주로 이사와서 불교신자가 되었다.

그가 말년에 중국으로 돌아갔을 때 문답식으로 된 최초의 중국어로 된 불교에 대한 작품인 이혹론(理惑論)을 썼다. 그는 당시 불교에 대한 지식의 오류를 바로 잡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이름은 6세기에 승유(僧有)가 출판한 황명집(黃明集)에 인용되어 나타난다.

작품 속의 37가지 문답 가운데 분석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중국지배의 초기에 베트남에 소개된 불교의 상황뿐만 아니라 교주에 불교의 파종에 대한 모자(眸子)의 역할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유교와 도교에 대하여 높은 지식을 가진 그는 젊은 시절에는 학자가 되려고 하였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후한 제국(後漢帝國) 말기의 사회적인 대격동의 시대에 오로지 평화지대인 교주로 피난을 나왔다. 루이라우에 도착하였을 때 불교를 배우고 신봉자(信奉者)가 되었다.

모자(眸子)는 인도인 승려이든, 베트남 승려이든 마다하지 않고 불교의 가르침을 배웠다. 모자가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에 대한 지식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루이라우에는 이미 불교에 대한 중국어 번역 텍스트가 있었다. 많은 불교도들의 세미나와 절이 루이라우에 있었고 불교에 대한 학교의 기능을 하는 그 곳에 추종자들이 모이고 그 무리 중에 모자도 일원 이었을 것이다.

‘승려 중에는 술을 마시고, 처자를 거느리고, 상업에 종사하고, 거짓말하고 사람을 기만하고…’ 불교가 번성함에 따라서 상당수의 추종자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자 많은 수의 승려들이 명예와 이익을 구하고, 술에 탐닉하고, 고기를 먹고, 처자를 거느리기 위한 목적으로 불교에 유착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다 중요한 점은 당대의 불교의 실제 상황인데 이미 불교가 번성하였으며, 많은 수의 승려가 있었고, 일종의 데카당스(衰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대표자들과 철학 학교에서 만들어진 편향(偏向)된 주장과 비평에 대한 논박(論駁)도 발달하였다. 이혹론은 유교와 도교의 추종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불교를 지키는데 기여하였다.

베트남 승려들은 풍속과 의식과 생활방식의 관점에서 인도인 승려들이 하는대로 따라하였다. 이혹론에서 이렇게 전한다. ‘승려들은 붉은 색 원단으로 만든 승복을 입고 다른 사람들의 관례에 따른 유교의 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2세기에 승려 무언통(無言統)이 베트남에 도착하였을 때 그는 베트남의 제2의 불교 영역인 선종(禪宗)이 존재하고 중국불교신자의 법식에 따른 법회가 이 나라에서 시행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승회(康僧會)의 명상과 관조(觀照)

강승회는 베트남의 명상과 관조의 시조라고 말 할 수 있다. 강우(姜犹:소그디안 혹은 우즈베키스탄인) 태생의 그는 교주에서 불교를 배우고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하였다. 승회의 부모는 처음으로 인도에서 교주에 이민을 와서 교주에 정착하여 승회를 낳았다. 그는 10살때 그의 양친을 모두 사별하고 석존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한어(漢語)를 매우 잘 했다. 교주에 불교 신앙이 전파된 뒤 불교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서기 255년 그는 오(吳)의 손권(孫權)의 치세 때 오나라의 수도이던 오늘날의 남경(南京)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여 서기 280년 진(晉)왕조 시대에 중국에서 입적하였다.

강승회는 일생동안 많은 량의 불교경전을 번역하고 주석하였으며 지금은 불행하게도 망실되고 없는 ‘육도요목(六道要目)’과 ‘니환반배(泥還反背)’ 2권을 저작하였다. 12권의 번역서 중 다섯 권이 남아 있다. 그 중의 사트바라미타 산니파타 수트라(낭조 143) 사무익타 아반다나 수트라(낭조 1359) 2권은 유럽의 학자들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이 두 책은 프랑스의 샤방에 의하여 불어로 번역되었는데 ‘오백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었다.

이 책에서 승회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라고 이름하는 보리살타(菩堤薩陀)의 여섯 가지 주요 덕목을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아반다나와 자타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승려 비니타루치가 법운사(法雲寺)에 도착하기 전에 베트남에 명상의 공부를 전파하였다. 이것은 사실 석존이 가르친 명상의 방법으로 명상을 통한 리드미컬한 숨쉬기로 구성된 안반선(安般禪)이었다.

승회는 불교를 배우고 베트남에서 승려가 되었고 중국에 불교의 포교를 위하여 갔을 때 훌륭한 명성을 날렸다. 오나라의 왕 손권은 그를 위하여 건초사(建礎寺)를 건립하고 그 곳을 부처가 머무는 자리란 뜻으로 불타리(佛陀里)라고 부르게 하였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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