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8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8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4.04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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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불교의 정점, 이씨 왕조 시대


이씨 왕조(1010-1225)하에서 베트남의 사회는 점차 안정되어갔다. 중앙집권주의 국가체제가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확산되고 형서(刑書)혹은 형법이 반포되었다. 관개수로의 발달을 가져온 정책 덕택에 농업경제는 괄목하게 발전하였다. 산업과 상업과 해외 무역에 진보를 가져왔다.

사상과 도덕분야에서 특히 11세기의 마지막 10년은 공자의 사상이 점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위가 침식되지 않고 오히려 이씨 왕조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이공온(李共蘊)에 의하여 창건된 이씨 왕조는 불탑이 증가하고, 왕조의 건영을 비는 캠페인이 진행되는 과정에 비니타루치 선맥의 만행선사나 무언통선종의 다보(多寶)선사와 같은 불교계의 비호를 받았다. 그가 왕위에 취임하고 나서 그의 치세 동안 계속하여 태조 이공온은 불교발전에 유익한 많은 칙령을 반포하였다. 전국에 사찰을 건립하게 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장려하고 불경에 대한 의문을 묻기 위한 종교 사절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모든 이씨왕조의 왕들은 불교를 수련하였다. 이태종(李太宗)은 무언통 선맥의 일원이며 이성종(李成宗)은 초당(草堂) 선맥의 초조(初祖)였다. 이어 이 선맥의 멤버로써 이영종(李英宗)은 3조가 되고, 이고종(李高宗)은 5조가 되었다. 왕위를 소황(昭黃)에게 물려준 뒤 이혜종(李慧宗)은 자진하여 혜광(慧光)이라 불리는 승려가 되기도 했다.

왕들이 불교를 비호하는 동안 귀족과 정부 고관들 또한 자연적으로 그들의 전례에 따르게 되었다. 이씨왕조 시대에 거대한 사찰과 탑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은 왕이나 귀족 혹은 정부의 관리에게서 나왔다. 다음은 영융사(靈融寺)의 중심주(中心柱)에 나타난 글이다.

“불교는 2000년 전에 발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새롭게 활동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면 의례히 사람들은 절을 짓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일은 주인이나 정부의 고위 관리의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상류층의 보조 덕택에 이씨 왕조 하에서 불교는 그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그 영향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1010년 화로(花盧)에서 탕롱(昇龍)으로 수도를 천도하자마자 이태조는 수많은 절을 건립하였다.

벽지인 탄화에 정과 여씨 왕조 하에서도 많은 절이 건립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씨 왕조하에서 특히 탄화(城化)의 정부관리인 이상걸(李常杰)대에 많은 절이 건립되었다.

응에안(宜安)지방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귀족과 정부고관들은 지방정부 관리로 이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 이일광(李日光)을 파견하였다. 이어서 유경담(劉慶潭)을 보냈는데 이들 또한 많은 절을 건립하였다.

절이 많이 늘어남에 따라 승려의 수 또한 증가하였다. 탕롱(昇龍)으로 천도가 행하여진 서기 1010년 초에는 이태조가 백성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장려하였다.

서기 1014년 승려의 우두머리인 심문완(沈文宛)의 요청으로 탕롱의 운혜사(雲慧寺)에 학승들이 수계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제단을 설치하였다. 서기 1016년 탕롱의 거주자 1000명이 승려로 임명을 받았다. 서기 1019년 이태조는 전 국민에 대하여 승려를 권장하는 왕의 칙령을 발표하였다.

이씨왕조시대에는 이러한 많은 수의 제자 승려들을 먹이기 위하여 국왕이나 정부고관 혹은 귀족들이 매우 많은 전답(田畓)을 증여하였는데 이러한 토지는 공공 용지로부터 회수한 것이었다.

많은 승려가 식읍(食邑)을 받았다. 토지세에 대하여도 왕의 특혜가 주어졌다. 만행선사나 다보선사와 같은 승녀는 이씨왕조 초기에 민중의 정치적인 생활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선원집영에 따르면 “태조왕은 그의 즉위 후에 다보선사를 자주 초청하여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이씨왕조 문화의 특성은 불교를 존중하고, 승려들의 생활환경을 확고하게 하여 주었으며, 절의 행사를 주기적으로 갖는 것이었다. 많은 수의 가람과 탑이 여러 취임 축하연을 계기로 왕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다. 서기 1121년 숭선면령탑(崇善面靈塔)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이러한 축하연의 활기 있는 상황에 대하여 일련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는데 "취임식에는 왕의 권위를 앙양하기 위하여 가마가 준비되고 절에 이르는 길이 깨끗하게 청소되었다. 향에 의한 연기가 마치 산허리를 몽롱하게 두른 구름처럼 짙게 드리우고 온 길과 사거리에 나무가 심어지고 장식한 깃발로 뒤 덮이고 북과 피리와 징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하였다. 왕은 가마에 타고 앉아 삼보(三寶:불•법•승)의 꽃마차가 선도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씨 왕조하에서는 절은 단순히 승려들의 집합처일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그들의 종교를 수련하는 장소였고, 문화적인 행사와 활동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많은 대 사찰들은 불제자들의 배움의 장소이며 지방 어린이들의 학교이기도 하였다.

서기 1011년 탄롱(昇龍)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이태조는 불경을 보전하기 위하여 진복(鎭福)도서관을 건설하였다. 서기 1018년 원도성(阮道成)과 범학(范鶴)을 중국에 다시 파견하여 송왕으로부터 삼장에 대하여 묻도록 하고 그책은 서기 1020년에 베트남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 책들을 보관하기 위하여 팔각(八覺)도서관을 건설하게 하였다. 서기 1023년 이 책들의 복사본이 출판되고 1027년 대흥(大興)도서관에 보존되었다. 그의 명에 의하여 삼장의 다른 복사본도 나타났다.

1034년에는 같은 목적으로 태송(太宗)왕이 선유산(仙遊山)에 중광(重光)도서관을 건설하였다. 같은 해 하수(河樹)와 두관(杜寬)을 중국에 사절로 파견하여 송왕(宋王)으로 부터 다른 종류의 대승경전의 사본을 받아왔다.

1036년 이태종(李太宗)은 다른 사본을 만들어 새로 낙성식(落成式)을 한 중흥(重興)도서관에 보관하게 하였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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