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1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1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4.2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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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왕조(陳王朝 1225~1400년) 시대의 불교

 

1226년 음력 정월에 진경(陳景)의 왕위 즉위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로서 이씨 왕조(李朝)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중앙집중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진왕조의 출현으로 지방호족 세력이 제압당하고 권력이 중앙집권적으로 다시 회복 되었으며 생산력 또한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토지의 개간, 댐의 건설과 해변영토의 증가로 농업이 활발하여졌다. 상공업의 발달로 직공들의 촌락이 진보를 가져왔다.

시장경제 또한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외국의 무역선이 운둔(雲屯)의 항구에 도착하고 다른 항구에서도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정치기구도 향상되어 중앙정부에서 벽촌의 구석까지 고루 퍼졌다. 통제(統制:고대관직)는 법령을 제정할 목적과 정부 기념일을 정례화 조직화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민족주의가 몽고제국의 침략을 승리로 이끈민중들에 의하여 보다 강화되고 예술과 문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중국한자에서 차용한 베트남 현지 문자 인놈(nom)이 창제되어 쓰이기 시작하였다. 민담, 전설, 민족 영웅의 무훈담이 편찬되기 시작하였다. 국사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대표작으로 <대월사기>가 유명하다.


고급관리를 임용하는 과거제도가 정기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유교가 사회구조와 정신적인 생활에 점차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진왕조에서 불교는 여전히 14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진왕
조의 왕들은 유교와 불교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진인종(陳仁宗) 왕은 그의 저서 선종지남서(禪宗指南敍:선종에 대한 지침서)에서 “무명(無明) 으로 부터 해탈과 생사(生死)의 까닭을 아는 길은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이다. 행복을 위한 정의의 율법을 숙지하고 미래를 위하여 계를 지킴은 성문을 위한 커다란 책임이
다. 내가 어찌 성속(聖俗)의 책임과 부처의 가르침을 내 자신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진 왕조(陳朝)의 불교는 유교와 하모니를 이루며 발달하였다. 분열에서 통일로 진왕조하에서 불교는 죽림(竹林)종이 새롭게 개창한 사실과 베트남 초기의 선종이 소멸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죽림종의 개창을 이끈이는 진왕조 인종(陳仁宗)왕인데 1229년 불교에 입문하여 ‘죽림종의 개산조’가 되었다. 인종 왕이 불교에 귀의하기 전진왕조 70년의 존속기간 동안 불교발전의 성격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문헌은 모든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죽림종의 원조에 대하여 약간이나마 알고 있다. 죽림혜충상사어록(竹林慧忠尙師語錄)이 출판되고 그 속에 “약인선 파도 (略引禪派圖)” 라는 개요도해로부터 우리는 죽림종의
기원에 대한 계보를 파악할 수 있다.


통선(通禪)
식려(息慮)
응순(應順)
소요(逍遙)
혜충(慧忠)
죽림(竹林)
법라(法螺)
현광(玄光)


통선, 식려, 응순, 소요의 선계보는 선원집 영에 역시 언급되어 있다. 그렇지만 소요선사(逍遙禪師)는 응순학자
의 문하생으로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소요가 죽림종의 이데올로기를 규정 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 한다. 그는 혜충의 스승으로 진왕조에서 불교학에 정심하였다.


상사행장(尙師行狀)에서 인종 왕은 혜충선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20세 이전에 혜충은 이미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그는 복당(福堂)의 소요선사 문하에서 불교에 대하여 수학하였다.” 혜충은 그의 스승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하고 가장 헌신(獻身)하는 제자였다. 그러나 소요(逍遙)가 깊은 산 복당(福堂)에 거하면서 수련했던 것과 달리 혜충은 집에서 불교를 수련하는 학자였다.


혜충이 오로지 집에서 불교를 수련하고 있을 때 그의 제자였던 인종(陳仁宗) 왕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그것을 수련하고자 연자산을 설립하였다. 그래서 죽림종을 죽림 연자종(竹林燕慈宗)이라고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인종 왕 시대에 죽림종의 개산으로 말미암아 불교의 제파(諸派)는 통일 되었다. 13세기 불교의 발전은 이렇게 이씨 왕조와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왕조 시대인 12세기 말 불교는 심각한 자가당착을 경험하고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1198년에 고급관료인 담이몽(啖苡蒙)은 고종(李高宗)왕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재 일부 승려들은 종복과 같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그들의 우두머리를 뽑고 추잡한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청정을 유지하여야 하는 때에 향연을 벌리고 불교의 사원에서 도색질을 합니다. 그들은 대낮에는 숨고 밤에는 담비나 시궁쥐처럼 무리 를 지어 나다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풍속과 신앙을 훼손(毁損)하면서 그 짓을 계속합니
다. 이러한 폐단을 종식 시켜야 합니다”

 

담이몽의 제안에 이 왕조 시대의 고종은 많은 승려들을 핍박하고 승적(僧籍)을 박탈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진왕조하에서 불교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진왕조 시대의 왕들과 귀족들은 지속적으로 불교를 지원 하였고, 불교는 이에 호응하여 국가건설의 과업을 잘 이행하고 몽고(원나라)의 침략에 대항하는 투쟁 에너지원을 발휘하였다.


그러므로 13세기에 불교는 국민의 생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간여하고 그들의 생활을 정화(淨化)하였다. 말하자면 진왕조(陳朝) 하의 국민의 생활은 불교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의 숨결이었다는 것이다.


1236년 죽림선사는 태종 왕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왕이시여 백성을 공경하고 백성을 당신의 심장이라고 여기십시오”

 

이 정신은 백성이 국가의 기본이며 이후 인종 왕과 흥도 왕의 연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되었다. 태종 왕과 과허육(課虛六: 공(空)을 수련하는 서책) 태종(1219-1277)왕의 본명은 진경(陳境) 이다. 8세에 왕에 즉위(卽位)하였다. 그의
나이 18세 때에 그의 삼촌 진수도(陳首度) 가 사실상 권력을 행사하여 그를 핍박하여 그의 부인을 폐위시키고 그의 형제 진류(陳留)의 부인과 결혼하게 하였다. 이 강제 결혼은 불행한 일로 태종은 몰래 수도를 떠나 연자산(燕子山)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도는 그를 찾는데 성공하여 1236년에 다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이러한 이유로 태종은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10년 후에 그는 선종지남(禪宗指南)을 완성하였다. 이어서 여러 권의 불교 서적을 저술했는데, 과허록이 들어있는 태종의 첫 번째 책 선종지남의 서문만이 남아 있다. 과허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육시참회과 의는 하루에 6번 기도하는 기도자에 대한 의식을 다루고 있다. 금강삼매경주해는 그서문만 남아있다. 이 서문은 태종의 이 불경에 대한 열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과허록(過虛錄)의 텍스트 연구를 통하여 태종 왕의 사상에 대한 이해를 증진 시킬 수 있다. 그는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교육가이며 리얼리스트의 대변자인가하면 한편으로는 불교를 해석하는 논사(論師)이기도 하였다.


태종 왕이 파악한 존재론적 관점은 수니아타 즉 모든 것은 공허하며 없다는 것이다. 진태종은 념(念)이란 개념을 자주 차용한다. 그는 생각의 의미를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나쁜 생각과 좋은 생각, 고결한 생각과 비천한 생각으로 분류하였다.


그는 또한 인간의 신체와 같은 육안으로 보이는 구조에 대하여 원인의 의미를 논하였다. 보설색신(普說色身)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태아에서 만들어지기 전의 이 육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윤회(輪廻)에 의하여 인도된 염기(念起)에 의하여 온 결과이며 이후에 오온(五蘊)에 의하여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섯 가지 지각(색ㆍ수ㆍ상ㆍ행ㆍ식:色ㆍ受ㆍ想ㆍ行ㆍ識)이 상관관계를 맺어 함께 뭉쳐 사람의 형상과 몸을 통하여 출생함으로서 나타난 욕망의 표출이다.


그는 금강삼매경의 공부에서 그는 본성(本性)과 진성(眞性)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성품은 이해의 부족, 불완전한 멸절, 충만의 개념, 진성의 적정(寂靜), 우리 양심의 깊이에 따라 축적되어 가지만 사람은 이러한 모든 것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이런 것은 함께 할 수도 없거니와 버릴수도 없는 것이다. 잃거나 유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그 형상이나 그림자도 아니다.

우리의 귀는 그 메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존재라거나 무(無)도 아니다. 그것은 종교나 세상도 아니다. 이것은 진태종만이 설한 것이 아니고 진조(陳朝)의 모든 대덕들이 명백하게 요구하고 있는 성품을 파악하기 위하여 정신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왕조(李朝)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하였지만 진왕조와 같이 그렇게 강하게 주장하지는 아니하였다. 


태종 왕은 인간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 갈 것을 요구하고 특히 “인간의 본성(本性)은 단지 본래의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하고 이러한 것을 보는 것의 아픔을 강조하였다. “모든 사
람들은 항상 나아가려고만하고 돌아오는 것을 모른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인생의 좁은 길과 죽음으로 앞장서 가는 것이며 그의 본성과는 차차로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였다. “먼지 덮힌 길을 방랑하고 있네, 그의 고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네.”


이 여행자는 깨닫기만 하면 먼 길을 갈 것 없이 언제든지 그의 고향으로 돌아 갈수가 있다. 태종왕의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본연의 양심으로 돌아오게 요구한 것이다. 진태종에 의하여 씌어 진 보설향상일로(普說向上一路)는 사실상 이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하여 진리에 대한 지식과 선종의 관점에서 심도 있게
다룬 책이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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