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2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2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0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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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지배 시대(15-18세기) 베트남 불교
진 왕조 후기 및 명나라 지배하의 베트남 불교의 쇠락

이씨 왕조시대의 불교가 도교적 요소와 결합하여 다소 신비주의적 도술적 요 소를 띤 반면, 진 왕조 시대의 불교는 유교 문화와 결합하여 지적 원숙과 함께 찬란한 발전을 구가한다.

하지만, 14세기 중반인 진 왕조 말기에 들 어서면서 불교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그 주된 요인으로 불교를 후원하던 귀족 들의 경제력 상실과 진 왕조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들 수 있다. 경제적으로 대지주 시 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소지주 계급 이 부상하였고, 여기에 중국에서 들어 온 중 국인 유학자들이 사회의 주요한 자리를 차 지하게 된다. 유교와 중국적인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점차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변화에 따라 장한초(張漢超)나 여괄(黎刮) 같은 학자들은 불교를 비평하였다. 이 시 대 승려의 수는 너무 많았고, 그들의 비평 은 대중들에게 먹혀 들었다. 급기야 1396년 호귀리(胡貴厘)가 40세 이하의 승려를 강제 로 환속하게 하는 칙령에 서명하였고, 승려 계급을 숙청하기에 이르렀다.

진왕조 후기의 왕실의 혼란과 진(陳)과 호 귀리(胡貴厘) 사이의 권력다툼은 베트남에 명(明)나라의 침략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1407년 중국에 합병되고 만다. 이 통치 기간은 2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직적으로 베트남 고유문화를 말살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불교유산의 주요한 부 분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파괴 되었다. 심지어는 절의 지주와 탑까지도 파 괴되거나 말소되었다.

주로 승려들의 주도로 4세기 넘게 행하여 진 불경편찬사업은 중국에 몰수되거나 강 탈당하였다. 이 왕조(李朝)와 진 왕조(陳朝) 승려들에 의하여 쓰여진 모든 불경들이 사 라짐으로 인하여 15세기 이후 베트남 불교 의 오랜 전통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후 레 왕조(1428~1788) 시대의 불교 1428년 레러이(黎利)의 승리로 말미암아 명나라의 지배를 끝내고 레 왕조(黎王朝)가 창건되었다.

베트남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 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문학, 사상, 과학의 변화는 불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레러 이 역시 명제국으로부터 그의 왕위를 지키 고 진 왕조의 잔재를 없애고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 하여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진 왕조의 신앙과 모든 그에 관련된 것을 일소할 뿐만 아니라 진 왕조가 이룩한 모든 문화적인 성공을 근절하려고 하 였는데, 그 중에 죽림종(진 왕조시대 최 전성 기 불교종파)의 영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교의 발흥 독자적인 베트남 왕조의 설립은 11세 기에 불교의 사상적인 바탕 위에 세워졌 다.

딘(丁) 왕조(968~980)와 전 레(黎)왕조 (980~1009) 초기에 외교와 교육은 승려에 게 맡겨졌었다. 이씨 왕조(李朝:11-12세기)에는 승려들 이 정부의 조직에도 간여하였다. 인종(李仁 宗) 왕의 치세기간인 1057년 조각(組閣)에 는 삼교(三敎:불교, 도교, 유교)라고 부르는 최초의 경합을 통하여 과거제도에 의하여 관료를 선발함으로써 학자들이 정부활동에 참여하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진 왕조(12-14세기)하에서 이미 많은 수 의 유교학자들이 귀족이 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조정은 삼교 경합을 그대로 고수하였 으므로 불교는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하였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 불교승려와 달리 베트남에서 이씨 왕조(李朝)시대와 진씨 왕조 (陳朝) 시대 불교가 국교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불교가 높게 숭상 받음에도 불구하고 이씨와 진씨왕들은 국가의 조직에 대하여 유교학자들의 자문을 구할 필요성을 느꼈 다. 이것이 유교학자들의 발달의 초석이 되 었고, 진 왕조 말기 불교와 유교이념 간 분 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후 레 왕조(1428~1788) 후기에는 유교이념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그것은 조정이 중앙집권적인 군주제를 공 고히 하는 수단으로 유교이념이 효과적이 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레러이왕은 권력을 잡자마자 국자감(國子 監)을 다시 열고 1442년에는 과거제도로 박사 시험을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승 려들의 지방 시험을 관리하여 시험에 통과 하지 못한 승려는 환속시킴으로써 불교의 발전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레탄통(黎聖宗) 의 치세 동안 불교는 크게 타격을 받았는데 모든 불교의 행위는 미신으로 간주되고 그 러므로 사회에서 일소되어야 했다. 불교도의 영향은 박멸되었으나 종교에 대 한 억압이 아닌 정부의 정책을 통하여 온화 하게 이루어졌다. 레탄통치세에 반포된 홍 덕법전(洪德法典)은 중앙집권 하에서 불교 에 대한 언급이 없는 최초의 법전이었다. 불 교차별에 대한 분명한 반기를 렁테빈(梁世 榮)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다.

1442년에 태어난 이 학자는 1467년 박사 시험에서 수석박사로 뽑혔다. 한림시서(翰 林詩書)로 승진하고 왕 여성종(黎聖宗)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 영수가 된 회소단(會 遭壇:문학클럽)에 가입하였다. 그는 자주 왕으로부터 명을 받아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썼는데 그 격식이 매우 우 아하였다. 그는 불교입문서인 선문과교(禪門 科敎)의 저자로서 유교에 편향되는 것과 내세 를 부정하는 그릇된 사고를 깨우치기 위하여 그의 동료들과 함께 이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왕조(黎王朝)에 의하여 규제가 있었지만 불교를 전면적으로 일소할 수는 없었다.

박애주의 정신의 이 종교는 민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죽림종이 빛을 잃었지만 모든 불교 전체는 아니었다. 더구나 불교가 왕실에서 버림을 받을수록 민중의 정신으로 되어가고 이데올로기의 해방을 열망하는 사람들 로부터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레왕조의 강제적인 규제는 승려집단의 비 행을 부분적으로 억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진 왕조(陳 王朝)하에서 승려들에 대한 왕실의 비호는 게으르고 사악한 사람들이 승려가 되게 하 였다. 레왕조의 조치는 승려에 대한 직접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이러한 무자격자들이 속인으로 돌아가거나 군으로 징집되는 것 을 허락하게 함으로 종교사회의 정화를 돕 는 적절한 것이었다. 불교의 행사는 민중 사 이에 관습화되었고 레 왕조도 이에 일조한 것이다. 왕실에서는 연례적인 불교축제(법운사의 불상을 돌며 기우제 지내는 것과 같은)를 거 행하게 하였고 관복을 승려에게 수여하기 도 했다. 혜홍(慧洪)이 그들 중 한 명이다.

원저자: 명지(明枝), 하문진(河文進), 원재서(阮才書)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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