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5부
[베트남 불교문화 특집] 제15부
  • 베한타임즈
  • 승인 2018.05.2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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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종(南齊宗)과 남부베트남의 불교 중흥

17세기 중반으로부터 중국의 청이 명에게 승리한 후에 많은 중국인과 선사들이 명나라 중흥의 기치를 들고 나라를 떠났다.

이들 중 극소수가 베트남에 정착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국의 선은 임제(臨齊) 종이란 이름으로 초조(初祖) 웽티우(阮逍) 를 통하여 남부 베트남에 들어왔다. 본명은 따(謝)이며 별명이 환벗(換碧)인 웽티우(阮少)는 광동 (廣東)성의 찌우쪼우 (潮州)출신이다. 1648년에 나서 19세에 불문에 들어가서 바오뜨(報滋)사에서 봉카오 쾅빈(本稿曠圓)선사의 지도로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에 베트남 남부의 빈딘(平定)에 상선을 타고 상륙하여 그곳에 탑탑이다(十 塔彌陀)사를 세웠다. 이후에 투엉화(順化) 성에 들어가 하중사(河中寺)를 창건하였다. 후에 후에시가 된 푸록(富祿)에는 국안사( 國安寺)와 보동사(普東寺)를 건립하였다. 석주의 기록에 따르면 웽티우(阮少)는 1677년에 베트남에 도착하여 51년을 살았으며 1728년에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하여 사리탑을 세웠는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한량없는 내면의 명지가 밝혀져 그는 법을 설명하고 법을 해석하였다. 토론을 통하여 그는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였다. 그는 그가 장로로부터 배운것을 모두 기록하였다. 그는 확고한 전통을 고수하고 교리에 대한 잘못된 설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후세를 위해 길을 열어 보이고 그의 제자들을 완전하게 가르친다.”

무신년(戊申年:1728년) 10월 19일 그는 병들어 몸져누운 자신의 곁에 그의 제자들을 모이게 하고 그들에게 조언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핵심이 든 게(偈)를 남겼다. “법신(다르마카야)이 투명하고 맑은 것이 마치 반짝이는 거울과 같다. 그것은 어떤 흔적도 남김이 없다. 마치 보석처럼. 사실 모든 것은 하자가 있다. 모든 것은 실상이 없다. 다르마카야에 대하여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적막하고 비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는 중국 임제종의 제33대조로서 베트남에 임제종을 소개한 승려였다. 리우광(了貫)은 저명한 선사로서 남부베트남 죽림종의 제2대조이다. 그의 필명은 티엣이우(舌妙)이며 푸엔(富安)성 동쑤엉현 (桐春縣) 밧마(白馬)마을 태생이다. 1667년에 태어나서 여섯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불문에 들어 호이통사(會尊寺)에서 떼 빈(濟圓:중국인)선사의 지도로 처음으로 불교공부를 하였다.

다음으로 후에의 바오궉( 報國寺)사에서 작퐁(覺峰:역시 중국인)선사 아래에서 배웠다. 1691년 그는 자신의 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나이든 부친이 그곳에서 나무꾼으로 생활하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695년 그의 부친이 별세한 뒤 그는 후에로 돌아와 처음에는 석렴(石廉)선사의 지도로 다음에는 사림(詞林)선사(모두 중국스님)의 지도로 승려생활을 계속하였다. 1699년 리우광(了貫)은 여러 번의 전국 각 사찰을 도는 여행을 하였다.

1702년 그가 용산(龍山)에 갔을 때 중국스님인 자융( 子融)선사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가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이 되기 전에 선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수천의 불법에 중심주가 있으니 그 중심 주가 무엇인가?” 9년이 지난 뒤에야 리우광(了貫)은 전등록을 읽는 가운데 그 답을 발견하였다. “동문을 도우는 일을 하라 그러나 이것이 알려지면 안 된다.” 스승은 그에게 이 문장을 설명하여 보라고 하였다. 가파른 산정에서 굴러 떨어져 기절하고 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비열한 속임수를 피하는 방법을 발견한다.” 제자는 손뼉을 치며 빙그레 웃으면서 그가 이해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자융(子融)은 그에게 경고한다. “아니야, 그대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 네.”리우광은 응수하였다. “천칭(天秤)의 무게는 철로 만듭니다.” 스승이 말하였다. “아니야, 그건 그렇지 않아.” “만약 이르다고 하면 등잔에 불이 남아 있고, 밥은 너무 오래 뜸을 들입니다.”

1712년 자융이 광남으로 여행하였을 때 리우광은 그에게 2개의 게를 주었다. 스승이 물었다. “조사도 하나하나 승계하고 부처도 하나 하나 승계하였는데 그들이 전한 것이 무엇 인가?” 제자가 답하였다. “돌의 어린 싹이 거북의 털로 만든 일장(一 丈)붓처럼 솟아났는데 그 무게가 세근입니다.” 스승은 계속하여 말하였다. “한 높은 산정에 사는 사람이 배로 들어 가려고 밀어대고, 바다의 바닥에 사는 사람은 말을 몰아 질주하려는 것이네.” 제자가 응수하였다. “뿔 부러진 물소가 아침까지 아파서 끙끙 거리고 사람은 줄 없는 해금을 종일 연주합니다.”

리우광은 그가 스승에게 준 모든 문답을 문서로 작성하고 스승의 최종인가를 받았다. 1722년 리우광은 후에로 돌아와서 1733-1735년간 지내면서 불자들이 마련한 4번의 대법회에 참석하였다. 1740년 고찰 용선사로 돌아 왔다. 효명왕이 궁전에 들어와 함께 살 것을 제안하였지만 그는 자유 로운 삶을 택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1742년 그는 원통사의 법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다 시 후에로 돌아왔다. 1742년 가을 리우광은 병을 얻어 그 해 말에 입적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 終偈)를 그의 제자들에게 남겼다. “나는 70을 넘게 살면서 유무(有無)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네. 나는 오늘 나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네. 조사가 어디로 갔는가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네"

오늘날 대부분의 후에지방 이남의 남부 베트남의 불교는 임제종의 주요한 한 팔인 리우광(了貫)의 가지에 속한다 조동종(曹洞宗) 선맥(禪脈) 이세종(李世宗:1575-1599)의 치세동안 북부 베트남에서는 지교 일구선사(智敎一 句禪師)의 제자인 수월(水月)선사가 조동 종으로 알려 진 불교의 원리를 전파하였다. 태평(太平)성의 선흥(仙興)현 청조(靑潮) 마을 태생인 수월은 그의 승려로서의 본연의 일을 착수하기는 광닌(廣寧)성의 임양( 袵陽)사에서였다. 이것은 그의 중국여행에서 봉황산에서 여행하는 기간과 관련이 있는데 그는 조동종의 제 35대조인 지교일구선사(智敎一句禪師)의 제자가 되기를 자 청하였다. 지교일구선사는 그에게 통교(通 敎)라 이름을 지어주고 베트남 북부의 조동종의 36대조로 지명하였다.

수월은 하노이 에 있는 고애사(槐涯寺)와 홍복사(洪福寺)의 창건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절에 있던 그로부터 승계한 존연(尊演)을 비롯한 다른 승려들도 오늘날까지 조동종에 속한다. 남부 베트남의 조동종의 영향 웽티우(阮少)선사가 남부베트남에서 임제종으로 알려진 선종을 확장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 석렴(石廉)선사가 조동종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석렴의 본명이나 출생지 및 스승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 알려지지 아니하였다.

법명이 대산(大汕)혹은 한옹(漢翁)으로 알려지고 속칭 석두타(石頭陀)로 알려졌다. 석렴( 石廉)은 광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불경을 이해하였고 기상학이나 천문학 등에 대하여도 정통하였다. 그는 재능있는 예술가, 문필가, 시인으로 알려졌다.

중국에서 청나라가 정권을 잡자 그는 관료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불교에 투신하였다. 이후에 자주 전국을 여행하였다. 석렴에 의하여 씌어진 해외기사(海外奇 事)에 따르면 원복진(阮福臻), 원복주(阮福 周)와 흥련(興蓮)선사의 초청으로 을해(乙 亥:1695년) 정월 보름날에 석렴과 그의 50명의 제자들은 베트남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일행은 스무이레날에 회이안(會安)에서 배를 갈아타고 스무 여드렛날 순화(順化)에 도착하여 안구(安求)마을의 선림사(禪林寺) 개원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여기서 석렴은 불교와 불법을 가르쳤는 데 왕 웽민벙(阮明王)은 그를 자주 궁궐로 초빙하여 국내외 정치와 교육에 대하여 자문을 받았다. 그의 자문에 따라 청에 굴복하였으나 성채를 건설하고, 국경의 경비를 견고하게 하고, 군대를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정규군을 조직하고, 유교의 격식에 따라 도덕성을 고취시키고 재능을 계발하였다.

석렴은 조동종의 제 29대 조사가 되었고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1696년 병자년 유월 스무하룻날에 웽왕으로부터 조동종의 30대 조사로 임명되고 법명을 천종(天縱)이라 하였다. 청나라에서의 개인적인 명성과 달리 동시 대인들로부터 사기꾼, 마승(魔僧), 나부(裸婦) 의 사환(使喚), 중매쟁이, 밀수꾼등으로 생각 되었다. 그의 노년에는 지방관료인 허충(許 忠)으로부터 그의 악덕에 대하여 탄핵을 받아 태형을 가하고 공주(貢州)로 추방되기도 했다.

새로운 지방에서 그는 새로이 제자를 모았으나 지방정부로부터 배척되었다. 그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에 입적하였다. 그는 후대를 위한 저술을 하였는데 육리당집 (六理堂集), 해외기사(海外奇事), 금강직소(金 剛直疏)는 오늘날에도 읽히고 있다. 석렴에 대한 그의 인간성에 대한 것을 포함한 확실한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아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가치를 가진 해외기사( 海外奇事)는 읽히고 있고 우리는 이 비범한 사람의 본연적인 일련의 사상에 대하여 얻을 것이 있다. 베트남의 불교에 있어 석렴은 남부 베트 남에 불교를 부흥시키고 나라에서 조동종 의 초조(初祖)로서 인식되고 있다.

역  자:  반명근 VIETASIA LAWFIRM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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